세계 각국에서 보호무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나 경기불황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악령이다. 세계 교역량이 줄고 각국 산업이 침체되는 부작용이 있어도 당장 내가 살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이기적인 히든카드다.
보호무역주의가 발동되면 가장 피해를 입는 나라가 바로 우리다. 지난해 기준으로 우리나라 명목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이 차지한 비중은 56.2%나 된다. 통계를 작성한 1970년 이후 최고치다. 지난해 정보통신(ICT) 산업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4%에 이른다. ICT산업을 포함한 우리나라 전체 산업은 대부분 해외수요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글로벌 경기가 둔화되면 수출에 타격을 입고 경기전반에 직격탄을 맞는 취약한 구조다.
각국의 보호무역조치는 우리에게 치명적인 독이다. 당장에 닥친 장벽이지만 수출주도형 산업구조로 일관해 온 우리나라 입장에선 이를 뛰어넘을 묘안이 별로 없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1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IMF·WB) 연차총회 기조연설에서 “지속가능한 세계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국가 이기주의를 걷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다.
보호무역주의는 현실이다. KOTRA가 조사한 결과 올 들어 8월말까지 중국, 미국, 브라질, 인도, 유럽 등 해외 주요 수출시장에서 신규 혹은 강화된 보호무역조치는 44개나 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조사 결과에서도 올 들어 9월까지 우리나라에 대한 수입규제는 20건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전체 16건보다 많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6개월간 우리 수출기업이 통상환경 악화로 입은 직간접 피해액을 45억8000만달러로 집계했다. 올해 상반기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138억달러였으니 무시 못 할 규모다.
과거 반덤핑관세 부과, 가격담합 판정 수준이던 보호무역조치는 시간이 흐르며 지식재산권 침해 등으로 고도화하는 추세다. 삼성-애플 디자인 특허침해 소송전이 그렇고, 코오롱인더스트리-듀폰 아라미드 신소재 생산기술 특허침해 건 등이 그 사례다. 세계 각국의 안방에서 돈을 벌어가는 우리나라가 견제대상이 되면서 우리 기업과 해외 기업 간 특허소송도 급증했다. 2009년 154건이던 특허소송 건수는 2010년 186건으로 늘었고, 2011년에는 278건으로 껑충 뛰었다. 2년 사이 80.5%가 급증했다.
보호무역조치 대상 품목도 다양화됐다. 변압기, 세탁기, 강판, 탄소강관, 페놀, 무스프탈산, PVC 서스펜션, 태양광 폴리실리콘, 자동차 타이어 등 수두룩하다. 수입절차 강화나 자국산 사용 의무화 조치정도는 이젠 놀랍지도 않다. 문제는 이런 추세가 내년에도 꺾일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 경기 침체 장기화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보호주의적 통상환경의 개선 가능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 달러당 원화가치가 1100원대까지 상승하면서 가격경쟁력 하락은 물론 수출채산성 악화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애석하게도 우리의 관심사는 12월에 있을 대통령선거다. 야권 후보 단일화, 재벌개혁, 경제민주화, 북방한계선(NLL) 등에 관심이 쏠려 있다. 당장의 경제위기 극복과 내년 이후의 경제성장, 그 실현방안에 대해선 대통령후보나 국민이나 관심 밖이다. 그러니 믿을 건 공무원과 기업 밖에 없어 보인다. 대선 주자의 부처개편,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할 지라도 맡은 바 소임을 다해 달라. 수출유관 기관이 공조하고 보호무역에 대한 시나리오별 대응책 마련에 힘쓰는 진정한 애국자의 모습을 보여 달라. 지금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건 그대들뿐이라는 게 가슴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정훈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