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훈의 디지털 확대경]위기에 대비하라던 천고마비의 경고

하늘이 부쩍 높아졌다. 무르익은 곡식은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다. 오늘날 천고마비는 평안하기 그지없는 가을을 의미한다. 하지만 원뜻은 그리 평화롭지 못하다. 역사서 기록상 기원전 3~4세기 이후 수백년 동안 이어온 흉노와 한족 간의 갈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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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마비의 어원은 추고마비(秋高馬肥)로, 당나라 시인 두보의 할아버지인 두심언이 변방의 친구를 기다리며 쓴 시 `증 소미도(贈 蘇味道)`에서 유래한다. 시 내용 가운데 가을하늘은 높고 변방의 말은 살찐다는 내용의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가 그 어원이다.

유목기마민족인 흉노는 겨울나기에 필요한 곡식을 확보하기 위해 가을걷이가 끝난 중국 북방 변경을 매년 넘나들었다. 그들 입장에서 기동력과 전투력의 근간인 말이 살쪄 전투력이 최상이 되는 가을은 절호의 시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흉노가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하는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조나라, 훗날 진나라와 한나라 입장에선 가을이 반가울 수만은 없었다. 천고마비의 계절은 공격하는 자나 방어하는 자 모두 전쟁을 대비해야 할 시기였다. 최소한 과거 수백년간 천고마비는 오늘날의 평안함과는 거리가 먼 긴장감과 불안감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가을을 맞아 대기업의 3분기 실적이 하나둘씩 공개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규모인 8조원의 분기 이익을 냈다는 소식이다. LG디스플레이, SK하이닉스 등도 흑자전환에 성공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의 한 외교전문지는 우리나라를 두고 “글로벌 경제위기의 승자”라고까지 표현했다. 우리나라 국가 신용등급도 껑충 뛰었다. 기분 좋은 수확이다.

하지만 이는 지난 3분기 즉, 과거의 성과일 뿐이다. 착시현상이다. 일부 대기업이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어도 제조업 전반이 느끼는 경기는 3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이다. 지식경제부 등이 내놓은 3분기 제조업 기업경기실사지수(BSI)에서 실적현황을 보여주는 시황지수는 84였다. 기준치 100과는 큰 괴리를 보인다.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 1분기의 65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한국은행이 내놓은 9월 제조업 업황 BSI도 69에 불과하다. 전월보다 3포인트 하락했다

곧 닥칠 미래는 어둠 그 자체다. 당장 한국은행의 시각은 비관적으로 변했고,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4%로 곤두박질쳤다. 우리나라가 3% 미만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건 1970년 이후 지금까지 다섯 번뿐이다. 오일쇼크와 외환위기 같은 초대형 위기 때뿐이었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한국은행은 내년 전망치도 종전 3.8%에서 3.2%로 대폭 낮췄다.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유로존 채무위기는 “이제 절반이 지났을 뿐”이라는 미국 경제전문가의 진단도 지난주 말 나왔다. 암흑을 터널을 지나오며 조만간 빛이 보일 거라던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믿고 싶지 않았던 L자형 경기침체 가능성은 이제 가장 유력한 경기전망으로 부상했다. 창사 이래 사상 최대 매출과 이익을 기록하며 여유가 생겼을 법한 삼성조차도 “위기는 이제부터”라며 위기대응을 강조하고 나섰다.

마음이 넉넉해져야 할 천고마비의 계절이 긴장감과 불안감을 키워야만 했던 2000년 전의 추고마비 상황으로 급전환한 형국이다. 위기다. 위기 상황에서 기업의 대응력 이상으로 중요한 건 정부의 대응력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새해 예산안을 짜며 내년 성장률을 4%로 잡았다. 정부가 안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더 긴장해야 한다. 전략이 부실하면 전쟁에서 얻을 건 패배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최정훈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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