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이미 국토 면적당 에너지와 전력 소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1위 국가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소비자는 다른 나라 소비자보다 결코 더 많은 에너지 소비를 즐기고 있지 않다. 산업계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만큼 많은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수출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생산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공장을 지어야 일자리가 창출되는 제조업 중심 국가고 따라서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에너지 공급에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 발전소를 짓고 싶은 사업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송전탑 건설이 지역주민 반대로 지연돼 전력수급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다. 또 원자력발전, 신재생에너지 등과 관련한 미래 에너지믹스를 두고 사회적 합의를 하기 위한 논의조차 실종된 듯하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에너지시스템은 `빨간불`이 켜져 있는 것이다.
정부가 녹색성장을 국가 핵심 의제로 설정해온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의 에너지공급 불안 현상은 너무나 아이러니하고 당혹스러운 결과다. 특히 왜곡된 전기요금은 전기화를 부추기고 동시에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어렵게 한다. 이 때문에 수요는 늘고 공급은 부족해지는 상황이 고착화하고 있다. 결국 실시간으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해야 하는 전력의 특성상 블랙아웃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정부와 에너지산업계는 이러한 난제를 함께 풀어나가기는커녕 계속해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권이 바뀌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며 막연히 기다려 보자는 소리도 자주 한다. 그러나 2개월 남짓한 수명을 가진 대통령직인수위가 이 복잡한 연립방정식의 난제를 쾌도난마(快刀亂麻)할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전력계를 구성하고 있는 정부, 한국전력, 전력거래소, 다수의 발전사업자 그리고 시민사회, 소비자가 모두 모여서 스스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
정부는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을 준비 중이다. 1차 에너지기본계획은 어느 시점보다도 더 낙관적인 관점에서 수립됐지만 그동안 너무나 여건이 크게 변해 대폭 수정이 불가피하다. 저렴한 전기요금으로 전기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반면에 전력망 포화 현상은 안정적 전력수급에 가장 심각한 걸림돌이 되고 있고, 스마트그리드 등 기대했던 기술 혁신은 지연되고 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원자력의 사회적 수용성이 급격히 낮아졌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국제적 압력은 조금 완화됐고 셰일가스와 같은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이번 2차 에너지기본계획은 엄격한 물리적·공학적 제약 요인 아래서 형평성 있는 에너지 배분과 관련한 정치·사회적 갈등 문제까지 풀어야 하는 고난도의 숙제를 안고 있다. 우리나라 에너지시스템을 제로베이스에서 새로 설계하고 이해가 상충되는 모든 시장 참여자에게서 양보와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은 그나마 어렵게 유지하고 있는 제조업 경쟁력을 살려갈 수 있다.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에너지문제의 심각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각 경제주체들과 진지하고 진솔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구축하는 과업은 이미 엔지니어링 수준을 넘어서 정치사회적 이슈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부의 2차 에너지기본계획이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는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또 이들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전하고 생산적인 에너지 거버넌스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김창섭 가천대학교 에너지IT학과 교수 cskim40718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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