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회로기판(PCB)은 전자제품의 `혈관`이나 `신경망`에 비유된다. 실핏줄 같은 전기배선 회로로 각종 전자부품을 전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TV·냉장고·컴퓨터는 물론이고 자동차·슈퍼컴퓨터·항공기에 이르기까지 전기·전자 제품에 빠짐없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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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폭증에 너도나도 뛰어들어=1987년 가전·컴퓨터 등 전자·전기제품의 내수와 수출이 동시에 늘어나면서 필수 부품인 PCB 수요가 폭증했다. 이 시장을 겨냥해 PCB 생산 능력을 확대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가 당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앞서 시장에 진출한 대덕전자·대덕산업·새한전자·코리아써키트·한일써키트 등 6~7개 선두 업체는 대대적으로 설비를 증설했다. 대협전자·대일전자·신성전자·정풍물산 등 10여개의 중견 기업은 새롭게 시장에 진입해 당시 돈으로 적게는 수십억원, 많게는 수백억원 규모로 신규 투자를 단행하면서 PCB 시장은 과열 양상까지 보였다.
이후 시장이 포화되고 사업이 부진해지자 일부에선 경영권을 넘기거나 문을 닫는 기업이 생겨났다. 또 디지털 기술 발달로 전자·전기 완제품 시장이 변하고 저전력·친환경 이슈 등이 등장하면서 기업 간 부침이 심해졌지만 1980년대 후반은 국내 PCB 산업이 한 단계 발전하는 시기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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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 확보로 국산화 이뤄내=우리나라 PCB산업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 1960년대 경제개발정책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산업 육성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와 산업계가 해외 전자산업계를 시찰한 뒤 본격적인 기술 습득에 나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PCB 생산은 1964년에 이뤄졌다. 삼성금속화학공업이 외국 기술을 들여와 단면 PCB를 생산했다. 이후 1972년에는 현재 대덕전자의 전신인 대영전자가 설립돼 국내에서 양면 PCB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어 민간을 중심으로 많은 투자를 하면서 1975년에는 양면 PCB 국산화가 이뤄졌다.
중소기업에서 시작한 한국의 PCB 산업은 1977년 대기업으로는 처음 현재의 LG전자가 시장에 진출하며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아울러 대덕전자가 다층인쇄회로기판(MLB) 등을 국내 처음으로 개발하면서 PCB 업계를 주도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어 1983년 한일써키트가 상장한 사건은 시장에서 PCB 업계가 더욱 신뢰를 얻는 이정표가 됐다.
초기에는 라디오·흑백TV·테이프 리코더·계산기용 PCB가 주종을 이뤘다. 그러다 1974년 국내 처음 한국나쇼날이 컬러TV를 생산하기 시작하고 1978년에는 국내 가전 종합 3사가 모두 컬러TV를 생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됨에 따라 PCB 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컬러TV 국내 방영 개시와 전자교환기 도입 사업이 본격화하기 시작해 PCB 수요가 급증했다. 컬러TV의 폭발적인 보급과 VCR의 등장, 그리고 전화기와 개인용 컴퓨터 붐으로 고성장을 거듭하던 PCB 산업은 1990년대 초반 경기 침체 등으로 고비를 맞기도 했다.
1990년 중반 불어닥친 정보통신 신드롬은 PCB 산업의 재도약 기반이 됐다. 분야별로는 단면 PCB를 비롯해 정보통신기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되는 양면 PCB, 다층인쇄회로기판(MLB) 등 산업용 PCB, 연성 PCB(FPCB) 등 전 분야에 걸쳐 고르게 성장했다.
국내 PCB 산업은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으로 인한 내수 침체와 수출 단가 하락으로 성장세가 주춤해졌다. 하지만 이동통신기기 및 관련 시스템 장비에 들어가는 MLB, 반도체 패키지용 기판(BGA) 등 첨단 기종을 중심으로 다시 수요가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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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중심에 우뚝서다=우리나라 PCB 산업은 각고의 노력 끝에 현재 세계적 수준에 올랐다. 지난 2011년 기준 시장 점유율 4위로, 세계 PCB 산업의 중심에 섰다. PCB 강국으로는 이제 한국, 일본, 중국이 꼽힌다. 이들 동북아 3국이 세계 PCB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64%에 이를 만큼 중심지로 부상했다. 우리나라 관련 시장 규모는 74억81000만달러로 세계 시장의 13%를 차지한다. 각종 원·부자재에서 설비·임가공 등 후방 산업을 합친 산업 규모는 15조원을 넘어섰다. 산업 규모만 놓고 보면 PCB가 반도체·디스플레이에 못지않은 주력 부품 산업의 위상을 자랑한다.
기업들도 탄탄해졌다. PCB 매출액 10억달러를 넘어선 삼성전기를 비롯해 상위 5대 기업들은 매출액 5000억원 이상으로 올라섰다. 또 지난해 국내에서 매출액 1억달러 이상을 기록한 중견 PCB 기업 수는 16개사가 됐다. 일본의 30개사, 대만의 27개사와 비교하면 적지만 짧은 업력을 감안할 때 허리가 탄탄해진 것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가 스마트폰 강국으로 부상하며 PCB 산업이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다. 특히 FPCB 업계는 `신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2003년 6000억여원에 불과했던 국내 FPCB 시장 규모는 10년도 안 돼 1조9000억원으로 성장했고 한국 제품은 해외에서 점유율을 늘리며 국내 PCB 산업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소재·장비 등 후방 산업 체력을 더욱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후방 협력사들은 품질 관리에 취약하고 노후한 설비로 제품 불량률도 높다. 인력 이동이 빈번해 숙련 노동자 양성도 미흡한 편이다. 재무 여력이 취약한 탓에 늘 부도 위험에 노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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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PCB를 이끈 인물들
PCB는 산업 특성상 인쇄와 금형 기술 복합화가 제조의 핵심이었다. 초창기 기술 장벽이 높았던데다, 국내에서는 처음 도전한 분야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국내 PCB 산업이 태동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전자산업의 미래를 위해 헌신한 주역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PCB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이다. 김 회장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우리나라 PCB 산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956년 서울대 통신학과를 졸업한 그는 1967년 국내 최초로 흑백TV와 VCR 등에 사용되는 가전용 단면 PCB를 국산화했다.
이어 1972년에는 PC·전자교환기 등에 탑재되는 양면 다층인쇄회로기판(MLB) 등 산업용 PCB를 개발했다. 이는 국내 전자 업체들이 수입에 의존하던 MLB를 국내에서 자체 조달, 세트업체의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데 일조했다.
특히 지속적인 기술 개발과 품질 향상에 전력을 기울인 결과 1980년대에는 TDX 등 전자교환기 국산화 계획에 참여, PCB 수입 대체 효과는 물론이고 전자교환기 국산화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 노력으로 PC·휴대폰 등 첨단 전자기기에 필요한 다층 PCB를 국내에 공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코리아써키트 창업자인 송동효 회장도 국내 PCB 산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 출신인 송 회장은 지난 1964년 삼성금속화학공업을 설립, PCB 산업의 효시를 이뤘다. 특히 지난 1972년에는 코리아써키트를 설립하며 김정식 회장과 함께 PCB 산업의 발전을 견인해온 양대 거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코리아써키트는 1974년 9월 단면 PCB로 미국 UL마크(승인 번호 E559917)를 획득했다. 이 일은 당시 국내에 진출한 외국 전자업체들의 국산 제품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코리아써키트는 지난 1992년 업계 최초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현지법인을 설립, 국내 PCB 산업이 해외로 뻗어나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4년에는 중국 현지법인을 설립, 중국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등 해외 시장 개척에 앞장서기도 했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