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은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새 전기가 열린 해다. PC의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 `소프트웨어`를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났고 `제1회 한국소프트웨어전시회(SEK:the Software Exhibition of Korea)`가 처음 열렸다.
전자신문사(당시 전자시보사)는 1987년 3월 11일부터 닷새 동안 여의도 중소기업종합전시장(KOFEX)에서 국내 처음으로 소프트웨어 전문 전시회를 열었다. 참가 기업 수가 29개였던 1회 전시회는 소프트웨어 역사를 새로 쓰는 시발점이 됐다.
전시회는 이후 해마다 규모와 질적 성장을 거듭해 하드웨어까지 아우르는 국내 최대 IT 행사로 성장했다.
◇소프트웨어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다=여의도에서 열린 1회 전시회는 전자신문사 주최로 체신부와 과학기술처·한국방송공사(KBS)가 후원했다. 한국3M 등 미국 기업을 비롯해 신항공무역 등 일본 기업, 그리고 일진전자·쌍용컴퓨터·텔레비디오코리아 등 한국 기업이 참여해 총 120여개 제품을 출품했다.
약 80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1회 전시회에는 제조·의료·무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소프트웨어들이 선보였다. 하드웨어와 사무기기 전시회는 있었지만 소프트웨어를 주제로 내건 전문 전시로서는 첫 시도였다. 소프트웨어의 정의와 개념, 적용 범위와 가능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기술로서 저변을 넓혔다는 큰 의의가 있다.
제품은 KOFEX 1층과 2층 공간에 제품을 전시했으며, 애플의 매킨토시2, 샤프의 전자수첩, IBM의 32비트 운용체계(OS)를 비롯해 경영 및 생산관리 등 기업 및 공공 기관을 위한 각종 전문 솔루션이 처음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판매 및 회계관리 자재소요관리(MRP) 시스템을 내놓은 대신컴퓨터를 비롯해 동원정보시스템은 철강 및 섬유기업용 무역업무 시스템을 선보였으며, 문화정보시스템이 의료보험 명세서 관리 시스템을 비롯해 금융 및 병원업무 시스템 등 다양한 업종의 솔루션이 선을 보였다.
삼성반도체통신은 32비트 마이크로컴퓨터와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을 출품했으며, 쌍용컴퓨터는 회계 및 인사정보시스템, 재무시스템 및 세무관리시스템 등을 대거 전시했다.
중소기업용 생산 및 경영관리 프로그램을 선보인 영일엔지니어링시스템과 유니온시스템도 눈길을 끌었으며, 당시 유니온시스템은 선거관리를 위한 시스템 등도 내놔 관람객의 관심을 끌었다.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전시한 미국 팔란티어소프트웨어도 참여했다. 또 이 전시회에서 한국3M의 대표 제품은 디스켓과 데이터 카트리지 등이었다.
◇외형·규모적 성장 거듭…명실상부한 대표 IT 전시회로=2회 전시회는 한국종합전시장(KOEX)으로 자리를 옮겨 외형적 성장을 시작한다. 2회부터 전자신문과 한국정보처리전문가협회가 전시회를 공동 주최했으며 협회가 주최하는 소프트웨어 공모전도 함께 열리면서 전문성을 더했다. 공모전 심사를 거친 상금은 대상(1000만원), 금상(500만원), 은상(300만원), 동상(100만원), 장려상(50만원) 등으로 수여돼 총상금액이 2000만원에 이르렀다.
또 2회 전시회부터는 삼성전자·금성사·한국IBM·한국후지쯔 등 국내외 대형 기업이 본격 참여하면서 명실상부한 대표 전시회로 발돋움한다. 삼성전자는 당해 컬러TV를 비롯해 디지털 오디오 제품, 비디오테이프리코더(VTR) 등을 내놓았다. 전시회에 공모전 작품 전시 공간을 내 소프트웨어 공모전에 입상한 작품을 특별히 전시하도록 하는 등 시너지가 도모됐다.
1989년 열린 3회 전시회에는 출품작이 650개로 늘어나 개최 3년 만에 규모가 수배로 커지는 성과를 이뤄냈다. 체신부가 주관하고 장관이 직접 개막식에 참여하는 위상이 높아진 대표적 행사로 자리매김한 해기도 하다. 1989년부터는 체신부 주관 아래 한국전기통신공사, 대한무역진흥공사, 한국정보산업연합회,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등 후원기관만 8개에 달했다.
4회부터 참여기업 수가 100개를, 6회 때 200개를 넘어서는 등 참여 업체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으며 1991년 전시회에는 삼성전자와 금성사를 비롯해 대우통신, 삼보컴퓨터, 현대전자 등 주요 PC 제조 기업이 모두 참여하는 등 하드웨어 업체 참가도 봇물을 이뤘다.
급기야 6회째부터는 전시회 영문 명칭에 컴퓨터(Computer)를 삽입, `The Computer/Software Exhibition of Korea`로 변경·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전시 관람객이 10만명을 넘어서면서 대중적으로 확대되는 등 국내 대표 전시회로서 급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이후 이 전시회는 각 업체의 신기술과 신제품을 선보이는 경연장으로 발돋움하며 전략적 홍보의 장으로 자리매김한다. 1994년도에는 285개 업체가 참여해 제품을 선보이면서 약 20만명의 관람객을 기록, 국내 단일 전시회로서 최고 기록을 세웠다.
빌 게이츠를 비롯해 다양한 해외 유명 IT 인사들도 전시회를 찾았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디지털 가전과 정보통신 및 방송, 모바일을 아우르며 범위가 확대됨은 물론이고 참가국도 늘어나 글로벌 전시회로 성장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소프트웨어 산업에 이어 IT 시장의 흐름을 보여주고, 차세대 IT를 이끄는 화두를 던지는 방향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 민병호 전 전자신문사 사업국장(현 한국유비쿼터스도시협회 전무)
1회 전시회는 천신만고 끝에 이뤄졌다. 규모가 커진 2회 개최에도 역경은 계속됐다. 1987년 1회 한국소프트웨어전시회(SEK)를 기획하고 주최한 민병호 한국유비쿼터스도시협회 전무(당시 전자신문 사업국 부장)는 1986년부터 준비한 전시회를 의미 있는 고난의 역사로 기억하고 있었다. 민 전무는 “1회 개최 당시 다른 전시회를 개최하는 타 기관의 외압으로 전시회에 참여하기로 한 업체들이 줄줄이 참여를 취소하고, 전시공간까지 취소를 당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전시회를 열었다”면서 “3회 이후 속도가 붙기 시작해 코엑스의 최대 고객으로 자리 잡는 규모의 성장을 이루기까지 적지 않은 땀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코엑스 대실 신청이 갑자기 취소돼 전시 장소를 여의도로 옮기고 간판급 기업들이 참여하지 못한 1회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결과적으로 씨앗 역할을 한 1회 전시회 이후 전시회 규모는 급팽창해 현재 대한민국 대표 IT 전시회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1회 전시회 개최 당시 전시장 한 쪽에 `OOO SW 무료 제공`이라는 팻말을 붙였다 떼는 해프닝을 겪는 등 `소프트웨어`를 보는 인식 전환은 전시회 개최의 중요한 화두였다. 민 전무는 “소프트웨어가 어떤 기기를 움직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소프트웨어 인식을 새로이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고 말했다.
각종 OA 기기 및 컴퓨터 등 하드웨어 전문 전시회는 열리고 있었지만 소프트웨어 전문 전시회를 표방한 것은 처음이었던 만큼 전시 배치와 방식 등도 많은 고민을 거쳤다.
민 전무는 “당시 기업마다 보안이 엄격하다 보니 다들 소프트웨어 디스켓을 주머니 등에 넣고 다녔는데 `누가 내놓겠느냐`는 비판도 받았다”면서 “아무리 문제점이 있더라도 소프트웨어를 화두로 거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심경에서 추진했던 것”이라고 기억했다.
전시를 이뤄낸 이후에도 운영은 녹록지 않았다. 2회째 코엑스에서 전시회가 열리면서 공간을 확보했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맞이한 코엑스 보수공사로 인해 뜯어진 지붕으로 비가 새면서 각종 컴퓨터와 시스템을 대피시키는 소동도 일어났다.
민 전무는 “당시 엄청난 금액의 값비싼 PC가 전시장에 전시돼 있었지만 물이 떨어지면 쓸모없는 제품이 될 수 있었기에 피신을 다니면서 전시를 해야 했고 PC 업체들의 성토도 엄청났다”며 “규모가 커지면서 이후 코엑스 전시장 전체를 쓰는 대형 전시회로 자리매김했지만 시작은 미약했다”고 설명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전시회로 부상했지만 여전히 소프트웨어가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에서 소프트웨어의 위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민 전무는 “해외에서는 소프트웨어가 중심이 되고 하드웨어가 보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반대였다”고 지적했다.
[표] 1987년 이후 초창기 전시회 주요 연혁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