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를 넘기고도 꺾일 줄 모르던 된더위가 처서를 만나 풀이 죽었다. 태풍 볼라벤은 잔더위까지 함께 쓸고 갈 태세다. 덕분에 바닥이 드러난 전력예비량에 가슴을 졸여야 했던 하절기 비상상황도 이젠 사실상 종료다. 올해 전력부족 위기상황을 국민발전소 건설, 산업체 휴가 분산, 공무원 쿨비즈 복장 착용 등의 아이디어로 간신히 버텼다. 그러나 따져보면 전력위기 극복에 우리가 한 일은 별로 없다. 8월 중순 이후 연일 비와 구름으로 더위를 식혀 준 하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불안하다. 전력피크의 망령은 올겨울과 내년 여름에도 다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 위기를 넘긴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발전비용이 가장 싼 원자력발전소를 더 짓는 게 해답이다. 이 역시 쉽지 않은 문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울진 1호기가 2017년 4월 준공되면 다소 숨통이 트인다는 점이다. 그 사이 5년을 불안 속에서 지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전기요금을 인상해 전력소비를 억제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해에 전기요금을 5% 안팎으로 한두 차례 인상하는 현행 방식으로는 필수재인 전기의 수요가격탄력성을 1 이상으로 끌어올리기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물가인상을 우려한 정부가 전기요금 인상에 소극적인 상황이라 여기서도 속 시원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결국 남은 방법은 다시 절전이다. 국민감정에 호소하는 지금의 절전 방식은 누가 봐도 한계가 있다. 효율적 대안은 절전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과학적 시스템 도입이다. 지금까지 검증된 확실한 방법은 남아도는 시간대의 값싼 전기를 모아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전력저장시스템(ESS)의 보급이다.
우리나라는 ESS의 핵심 부품인 2차전지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졌다. 국내 ESS 활성화는 물론이고 세계시장 선점에 한발 앞설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이 충분하다. 안타깝게도 ESS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절전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낀 일본이다. 일본은 절전 해법으로 일찌감치 ESS에 주목해왔다. 일본 정부는 ESS 보급에 210억엔(약 3020억원)의 지원금을 투입한다. 지원금은 민간 사업자에게 쓰이지만 소비자는 ESS를 3분의 1 할인된 가격에 구입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와 별도로 도쿄시는 중소기업용 ESS 보급에 150억엔을 쓴다.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사태)을 경험한 미국도 ESS 도입에 적극적이다. 상원에서 세제혜택 법안을 발의해 ESS 소비자에게 인센티브를 준다. 우리나라도 대구시 ESS 실증사업 등을 펼쳐 보급사업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아직 계획 대비 성과는 미미하다. 높은 ESS 가격을 상쇄할 만한 금융 지원책이 체계화하지 않은데다 심야시간대의 전기요금 할인책 등 ESS 수요를 자극할 대책이 갖춰지지 않은 탓이다.
국내 기업은 2020년까지 ESS 분야에 시설투자 13조원, 연구개발 7조원을 쏟아붓는다. 정부의 자극제만 더한다면 주마가편식 효과 창출은 당연지사다. ESS 큰 장은 이미 섰다. 연간 10조6000억원의 시장 규모를 갖췄고, 3년 후엔 세 배로 급팽창할 것이라는 낙관도 있다. 지금대로라면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은 3년 후 ESS 분야 세계 최강이 될 것이다. ESS 보급은 전력피크를 해결할 열쇠다. 엄청난 규모의 세계 시장은 덤이다. 전력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미래 수종산업을 키울 수 있는 일석이조 효과를 ESS에서 찾자.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