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당시 세계에서 인터넷 연결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과 한국뿐이었습니다.”
전길남(69)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1982년 5월 구미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간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 연결이 세계에서 두 번째였다고 회상했다.
전 교수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인터넷은 말이 안 되는 프로젝트였다”면서 “서울대 연구실이 비가 샐 정도로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세계 두 번째로 인터넷 연결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학계와 정부, 기업이 합심해 세계 최고 기술을 탄생시켜 보자는 열망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1979년 한국 정부가 외국에서 활동 중인 과학자를 유치할 때 귀국했다. 가난한 조국이 기술발전을 위해 과학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것을 보고 전 교수도 뭔가 조국을 위해 공헌하겠다고 결심했다.
전 교수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네트워크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연구에 KT, 삼성전자, LG전자 등 기업도 적극 참여했다. 인터넷 연구에 들어가는 통신비용이 현재 금액으로 1년에 2억~3억원이 들어갈 정도로 막대했음에도 불구하고 KT가 통신비를 전액 투자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도 글로벌 선진국의 사례와 기술을 참조해가며 전 교수의 연구를 도왔다. 덕분에 삼성에서 TCP/IP를 이용한 라우터를 1985년 내놓을 수 있었다. 세계 최초로 라우터를 개발한 시스코와 엇비슷한 시기였다.
전 교수는 “만약 1982년도에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한국 네트워크 개발은 10년가량 늦었을 것”이라며 “주변국인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1992년경 인터넷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네트워크 발전 역시 1990년 이후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 교수가 네트워크 개발을 주도했던 것은 국내 후학들을 위해서였다. 전 교수는 “미국 MIT, 스탠퍼드 등 미국 유수 대학들이 우수 논문을 인터넷에 올리고 인터넷 연결을 통해 바로 받아가라고 했다”면서 “한국에서도 미국 명문대와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1년의 60% 이상을 일본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는 곳이 어디냐는 질문에 `사이버 공간`이라고 답한다. “나는 물리적으로는 일본에 있지만 한번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내가 거주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서 “내가 사는 공간은 사이버 세상”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사이버 세상을 창조한 `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교수는 우리가 사는 사이버 공간을 정화하고 사랑하기 위해 역기능과 순기능을 모두 인정하고 더 나은 인터넷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전 교수는 우리나라가 초창기부터 인터넷에 있어서는 세계 리더그룹에 있었으니 그 경험을 살려 글로벌 시장을 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내에서 인터넷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먼저 경험했다는 것은 좋은 점과 나쁜 점 모두 앞서갔다는 뜻”이라며 “개인정보보호 침해, 인터넷 중독, 악플 등 인터넷의 역기능 또한 우리가 먼저 경험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타국과 경험을 공유해 진정한 선진국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우리는 자랑스러운 문화는 내세우고 싶어 하지만 부끄러운 과거는 가능한 감추려는 습성이 있다”면서 “최진실 자살사건 등 인터넷의 역기능으로 인한 우리사회의 어두운 면 역시 우리가 경험한 인터넷의 단면인 만큼 인터넷을 누구나 사랑하는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쁜 점까지 인정하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길남 교수는 누구인가
전길남 교수는 오사카대 전자공학과(학사)와 미국UCLA(시스템 공학 석·박사)를 졸업한 뒤 록웰인터내셔널 컴퓨터시스템즈 디자이너 등으로 일하다가 박정희 정부의 러브콜을 받고 1979년 귀국했다. 전자기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컴퓨터시스템개발부장 시절인 1982년 경북 구미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중앙컴퓨터 간 유선 네트워크 연결에 성공하면서 한국이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카이스트 전산학과로 자리를 옮겨 2008년 퇴임했다.
장윤정기자 lind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