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열린 세계반도체연맹(GSA) CEO모임에서 실리콘밸리를 주름잡는 반도체 거물들이 걱정을 쏟아냈다. 세계적으로 벤처캐피탈이 팹리스(반도체설계전문회사)기업에게 투자하는 사례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신생 벤처가 줄어든다는 것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다. 투자가 없으면 창업도 힘들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걱정하는 이들이 신생벤처로 골머리를 앓아야 할 글로벌 반도체 기업 CEO들이었다는 것이다. 신생 벤처기업은 기존 체제에 대항할 만한 창의적인 기술을 내놓고 도전장을 내민다. 벤처를 구성하는 인적 조직은 대개 대기업에서 나온다. 벤처 붐이 일면 이직률, 퇴직률도 높아진다.
골치가 아플법한데도 벤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걱정은 왜 일까. 그것은 산업이 살아 움직여야 기업 가치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산업이 정체되면 그 분야에 몸담고 싶어 하는 인재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코스닥 시장만 봐도 알 수 있다. 팹리스 산업 전반에 대한 주식 시장의 기대가 하락하면서, 어느 기업도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매출 100억원도 안되던 기업들이 1000억원 넘게 가치를 인정받으며 매각된 것은 옛 이야기일 뿐이다. 기업 가치는 하락하고 사람은 떠난다.
수 조원 대 매출을 올리는, 소위 잘나가는 팹리스 기업 CEO라고 해도 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거대한 쓰나미를 맞느니 눈 앞에 골칫거리가 늘어나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의 현실이 이럴진대, 한국은 말할 나위 없다. 아직까지 조 단위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기대하기 힘들고, 생태계는 망가져 가고 있다. 어디가나 인력난이다.
산업을 살리기 위해 큰 기업부터 나서야 한다. 대기업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생태계를 조성하고 사람을 키우는 데 투자해야 한다. “실리콘밸리의 힘은 산업을 함께 움직여 간다는 공동체 의식인 것 같다”국내 팹리스 CEO의 말이 맴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