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을 앞둔 K씨는 요즘 물건 하나 구입하기도 겁난다. 무심코 산 물건이 아이 건강에 해를 끼칠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최근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례를 접하며 걱정은 더욱 커졌다. 유아용품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됐다는 뉴스도 K씨에게는 남 얘기 같지 않다.
◇화학물질 관리, 화평법에 맡겨라=일상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 관련 피해 사례가 늘어나면서 K씨와 같은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늘고 있다.
국내 화학물질 유통량은 지난 2002년 2억8700만톤에서 2006년 4억1800만톤으로 46% 상승했다. 유통량 증가에 따라 환경성 질환도 늘어나고 있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 수는 64% 증가해 495만명을 기록했으며, 천식 환자 수는 같은 기간 20% 늘어나 242만명에 도달했다.
우리나라는 유해화학물질 관리법(이하 유해법)에 의해 신규 화학물질에 한정된 등록·평가제도를 운영하고 있어, 유해법 제정 전부터 사용된 화학물질(기존화학물질)에 대한 유해성 정보 부족으로 사전 예방적 관리체계가 미흡하다. 실제 약 4만3000종의 국내 화학물질 중 15%가량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유해성을 확인할 수 있다.
환경부는 유통되는 화학물질 관련 정보 등록제도를 도입하고, 유해·위해성 평가를 통해 화학물질 사전 관리방안 마련을 위해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2월 입법예고한 화평법 제정안에 따르면 정부는 그간 신규 화학물질에 대해서만 화학물질 유해성을 평가하던 내용을 기존화학물질까지 확대했다. 기존화학물질 중 국가가 용도·유통량 등을 사전 평가해, 위해정도로 볼 때 평가가 필요한 화학물질만을 평가대상물질로 선정하고 관련 제조·수입 업체에 대해서만 등록하도록 해 기업 부담을 최소화했다.
평가 대상물질은 사전에 예비등록 신청을 하면 최대 8년의 등록유예기간을 부여해 산업계 이행에 필요한 준비기간을 뒀다.
발암물질 등 고위해물질 유통을 사전차단하기 위해 용도에 따라 허가·제한·금지물질로 지정해 관리한다. 화학물질 제조·판매자 등이 화학물질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양도자는 반드시 양수인에게 해당 화학물질의 유해성 여부, 용도에 따른 사용제한과 관련된 정보 등을 전달하도록 했다.
◇산업계 ‘도입 늦춰야’=화평법 제정 취지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도입 시기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산업계는 “현재로서는 과도한 부담”이라며 제정을 유보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당초 2011년 국회통과 후 2014년 예비등록 시작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산업계 반발 등으로 일정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산업계 입장을 반영한 지식경제부와 환경부 간 입장 차로 1월 정책조정회의까지 거치게 될 전망이다.
지경부 관계자는 “화평법은 유럽연합(EU)의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보다 규제 수준이 강력하다”며 “일단 시범사업을 통해 법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개선하고 이를 반영해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경부와 산업계는 화평법 도입으로 지출하는 직접비용(화학물질 성분 분석비용, 등록비용 등)과 간접비용(대체물질 개발·사용, 원가상승으로 인한 매출손실 비용)이 부담된다는 입장이다.
대한상공회의소·중소기업중앙회·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등 14개 단체는 지난해 8월 화평법 제정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국무총리실 규제개혁위원회와 환경부·지경부 등에 제출했다.
산업계는 건의서를 통해 “법률안의 제정 목적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국내 산업계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EU·일본 등 선진국 규제에 따라 급속히 추진되고 있다”며 “먼저 시범사업을 시행함과 동시에 화평법 도입을 전제로 검토된 영향평가 결과 등을 공개해 산업계와 논의를 통해 국제경쟁력이 저하되지 않고 국제환경규제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연구원은 화학물질 등록 소요비용이 간접비를 포함해 2조7204억~13조1393억원에 달하며, 2015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0.01~0.09%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제조원가 대비 화평법 대응비용은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최소 10배 이상, 당기순이익 대비 대응비용은 최소 16배 이상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 화학물질 유해성·위해성 정보를 생산·제공해야 하는 책임이 대다수 중소기업에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환경부는 다양한 지원 사업을 통해 중소기업 부담을 줄인다는 계획이다. 화학물질 독성정보 DB구축·보급, 대체물질개발·DB구축 등 중소기업 녹색화학(친환경적 공정과 원료사용, 제품설계를 통해 화학물질 제조→사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해성을 최소화하는 것) 전환 지원을 위한 연구개발(R&D) 사업을 2011년부터 추진하고 있다.
2012년에는 중소기업 대상 화학물질 위해관리 지원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며, 2014년부터 중소기업의 등록활동 지원을 위한 지원기구를 운영한다.
환경부는 경제적 부담이 클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오염자 부담 원칙’에 의해 일정 비용은 산업계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는 입장이다. 시기상조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환경으로 인한 건강 피해가 증가하는 데다 화학산업규모 세계 10위권 국가 중 브라질·인도·우리나라 등 3개 국만 REACH 수준의 화학물질 정책이 없는 만큼 제정을 늦출 수 없다는 평가다.
환경부 관계자는 “시범사업은 법 제정 후 세부 규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충분히 연계할 수 있다”며 “2012년 국회 제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해화학물질 관리법’과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비교
자료: 환경부
유선일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