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돈의 인사이트] 과학은 흔들리지 않는 침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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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기술은 인류번영과 국가발전의 중심 축(軸)이며, 국력의 상징이다.’

 대한민국 500만 과학기술인들이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은 과학기술을 ‘민족적 저력의 원천’으로 규정했다. 우리나라가 반도체, 휴대폰, 조선, 자동차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확보한 것도 과학과 공학으로 무장한 과학기술자들의 노력 덕분이라는 주장이다. 일제 침탈과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여직공 손길과 근로자 피땀으로 경제성장의 귀한 새싹을 틔운 것도 같은 연장선이다.

 선언문에는 과학기술인들의 절절한 애국심과 기울어가는 국운(國運)에 대한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겼다. 과학기술인들은 현재 대한민국이 흥망성쇠 기로에 서 있다고 진단했다. 극렬한 이념논쟁은 국민 간에 갈등을 조장하고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은 피땀 흘려 쌓아온 국부를 탕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수한 인재들은 과학기술을 기피하며 산업현장을 떠나고 있다. 청년은 실업으로 절망하고, 중산층은 빈곤으로 내몰렸다. 노인과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재원은 고갈되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과학기술자들이 연구와 실험을 잠시 미루고 한 자리에 모였다. 엔지니어와 기능 명장들도 생산현장을 뛰쳐나와 동참했다. 왜냐하면 청년의 아픔을, 국민의 고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만 없기 때문이다. 공허한 이념논쟁으로 대립과 분란을 초래하는 이들에게 국가 장래와 민족의 운명을 고스란히 맡겨둘 수만은 없다는 각오다. 이에 과학기술인들은 애끊는 구국(救國)의 심정으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과학기술인들의 단순한 권리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다. 선언문은 국민의 행복과 겨레의 미래를 위해 과학기술을 국정운영 최우선 순위에 둘 것을 촉구했다. 과학적 합리성을 통해 땀 흘린 만큼 보상받는 정의로운 사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희망의 사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인류문명과 국가의 흥망에 대한 이론과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간절히 호소했다. 과학기술인으로서의 본분과 소임에 더욱 충실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인류번영에 이바지하겠다는 약속도 빼 놓지 않았다.

 ‘대한민국 미래와 성장’,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와 ‘인류번영’. 이것이 과학기술인 선언문 내용의 전부다. 선언문 어디에도 과학 ‘홀대’나 ‘찬밥’ 신세에 대한 원망과 푸념의 목소리는 없었다.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겪으며 이공계 인력은 우선순위 퇴출대상이 됐다. 그만큼 현장 연구자들의 불안감도 커졌다. 과학기술이 단순히 경제발전 도구로 전락하면서 정치권 관심도 소원해졌다. 실제로 MB정부 출범과 함께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 통합으로 교육과학기술부가 탄생한 지 3년여 만에 과학기술 관련 조직과 기능은 고사(枯死) 위기에 놓였다. 교육과 과학기술을 한데 묶은 현 정부의 무모한(?) ‘실험 정신’은 공격하기 딱 좋은 먹잇감이다.

 이런 상황에 과학기술인으로서 ‘이대로 가면,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과학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다’며 소리칠 만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정권이 오면 부총리급 장관을 수장으로 둔 강력한 과학기술부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선언문에 반드시 담길 줄 알았다.

 과학인들은 흔들림 없이 의연했고,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들은 포퓰리즘으로 피땀 흘려 쌓아온 국부를 탕진하면서 미래 성장동력을 갉아먹는 정치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자리 창출, 복지 증진 등 국가 현안과 미래 국정운영에 더 열심히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미래 희망을 얘기하며, 실천을 통해 국민과 언제나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정치는 어디로 튈지 모를 럭비공이지만, 과학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침대다.


 주상돈 경제정책부 부국장 sdjo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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