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스포럼] 한국,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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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이 한창인 1970년대.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할머니가 나를 반겨 주셨다. 시집올 때 이야기, 옛날이야기, 중국고전에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부모님은 장남으로, 맏며느리로 대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우리 4남매와 함께하기 어려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지금도 사랑하는 가족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다.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어가 새삼 중심어로 등장했다. 기업의 제품개발뿐만 아니라 영화 촬영지의 역사적 사건이나 현상으로 관광·문화상품을 개발하는 노력이 붐처럼 일어난다. 경제학자 맥클로스키는 “미국 국민 총생산의 28%가 상업적 목적의 설득에 있으며, 설득의 최우선 과제는 적절한 이야기를 찾는 것이고, 스토리텔링이 성공의 핵심 요소”라고 했다. 디지털 미디어기술의 발전 또한 컴퓨터게임과 애니메이션, 웹애플리케이션과 앱 등 개인이 수십 개 디지털 자아를 갖는 가상적 주체로 해체, 재구성되면서 스토리 창작 기회를 수평적으로 확장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텔링의 본질은 무엇일까. 할아버지, 할머니께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던 우리 모습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어머니 음성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즐기는 공간, 화목한 가족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가까이 있는 스토리텔링의 보물창고 ‘가족’을 다시 찾고 싶은 열망은 아닐까. 지난 세기 눈부신 한국을 이룩하기까지 역사 현장에서 이데올로기를 직접 겪으며, 치열하게 산 우리 부모님이 진정한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 아닐까.

 그런데 이들에게 무대와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70세 후반으로 우리 손주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됐다. 당신의 살아온 이야기와 경험을 나누고 싶지만 손자를 만날 수 없다. 핵가족화로 손주 마음 속에 가족의 일원이 아닌지 오래다. 명절 때나 만나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며 생물학적인 조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손자들은 사고를 형성할 때부터 새벽부터 밤까지 입시 전쟁 속에서 1세대와 교류하지 못한다. 대학교에 가면 입시 해방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나 ‘글로벌’이라는 명분 아래 외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문제는 이들이 정체성을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삶의 스승을 찾아 ‘가족’에게 돌아올 때를 1세대가 기다려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1세대는 자기 이야기를 전수하는 시기(65~75세)를 놓친다. 고독과 외로움, 치매와 질병, 노환 속에 모든 의욕의 끈을 놓는다. 3세대와 동시대를 살지만 1세대 이야기는 화석 같이 먼 역사가 된다.

 이들의 가슴을 열어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낼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디지털 미디어의 힘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도구를 개발해주리라 믿는다. 3세대, 4세대에게 활자로 된 역사서가 아닌 생생한 감동의 이야기를 직접 전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한류의 이야기며, 대한민국의 경쟁력이고, 후대가 먹고살 진정한 먹을거리다.

 이은령 숙명여대 미래문화산업 CEO과정 주임교수 alice@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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