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가 있다. 숲속 나무에 호박만한 크기의 빵 열매가 달린다. 주로 얇게 잘라서 굽거나 쪄서 먹는다. 열매를 손으로 뜯으면 빵을 찢은 것처럼 고운 결이 나온다. 가루로 만들어 과자 원료로 사용하고 땅속에서 발효시켜 먹기도 한다. 감자와 고구마를 섞어 놓은 맛으로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남태평양 섬나라 ‘마이크로네시아(Micronesia)’ 사람들은 주식으로 ‘빵나무(Bread Fruit, 학명 Moraceae Artocarpus spp)’를 먹는다. 290여개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이곳은 빵 열매가 열리고, 바다엔 물고기가 널렸으니 최소한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없다. 1년 내내 따뜻한 열대 기후여서 비를 막을 움막과 몸을 가릴 옷가지 하나면 충분하다.
그러나 탈무드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나온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인데, 신은 왜 빵나무를 만들어주지 않으셨을까?’ 인간에게는 빵나무 대신에 빵을 만들 수 있는 재료와 창의력을 주었다는 게 탈무드 설명이다.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그 것을 잘 활용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무에 빵이 열리는 섬나라 사람들도 열심히 공부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입학할 수 있는 명문학교도 있다. 매년 수백여 개 섬나라 인재들이 웨노섬에 위치한 4년제 세비어 고등학교(Xavier High School)로 몰려든다. 졸업생의 70% 이상이 미국 주립대학을 거쳐 국제기구에서 일하거나 고국으로 돌아와 지역발전을 돕는다. 마이크로네시아 인근 섬나라 대통령 4명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런 세비아 고등학교에 최근 한국 학생 2명이 입학신청을 냈다. 그러나 결과는 두 명 모두 탈락. 우리 학생들은 성적이 탁월했지만 면접에서 “왜 공부하려 하고,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빵나무가 있어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어도, 지금처럼 힘들게 공부하겠느냐?”는 갑작스런 질문에 우리 학생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가장 자주 쓰는 단어 중 하나가 ‘스펙(spec)’이다. 기계나 제품 사양을 뜻하는 ‘specification’의 약어가 이젠 사람에게 쓰인다. 취업을 위해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가전제품처럼 이것저것 다양한 성능을 갖추고 누군가로부터 선택되기만을 기다린다. 학교를 다니는 것도 스펙을 위해서고, 공부하는 것도 ‘스펙’ 때문이다. 스펙 쌓기를 위해서라면 남태평양 한가운데 잘 알지도 못하는 섬나라도 불사한다.
취업난이 심해질수록 스펙 쌓기는 ‘무한경쟁’을 넘어 ‘무한도전’으로 치닫는다. 해외연수에 어학 자격증은 물론이고 공모전 도전, 인턴, 봉사활동은 기본이다. 입사 지원서에 눈에 띠는 스펙을 한 줄이라도 더 넣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해병대까지 지원한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대졸 구직자 347명을 설문조사해 보니 취업 준비 중 가장 어려운 점으로 ‘높은 스펙’(42.7%)을 꼽았다. 사람인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구직자 86.8%가 스펙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취업 관문을 힘들게 통과한 직장인들도 또 다른 스펙 쌓기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탈무드가 주장한 대로, 인간은 누구나 빵을 만들 수 있는 기본 재료와 창의력을 가졌다. 빵을 만드는 재료가 하드웨어라면 창의력은 소프트웨어다. 나머지는 양념이거나, 아니면 오버 스펙(over spec)이다. 이런 기본적인 스펙을 어떻게 드러내고,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이냐가 우리에게 남은 숙제다.
주상돈 경제정책부 부국장 sd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