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말 소프트뱅크벤처스는 ‘심사역 딜(Deal)’ 프로그램을 전격 발표했다. 초기 스타트업(Start-Up) 기업에 한해 투자심의위원회(투심위) 없이 심사역 판단으로 투자하는 프로그램이다. 바이미·아이아라·숨피·써니로프트·데브시스터즈·로티플·앤써즈·썬데이토즈가 그 결과물(투자처)이다. 전체 투자사 30% 가량이 스타트업기업이다.
우려가 많았다. 과거 벤처 버블(거품)기 투자실패 경험 때문이다. 심사역 딜 프로그램도 비슷한 실패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업계는 소프트뱅크 행보를 그냥 지켜볼 뿐이다.
문규학 대표는 단호했다. ‘스타트업기업이 없는데 성장기업이 어떻게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그가 “한국에는 ‘스타트(Start)’는 없고 ‘업(Up)’만 있다”고 쓴소리를 던졌다. 스타트업을 제대로 챙기는 자본이 없다는 얘기다. 벤처 버블이 사라진 후 엔젤투자자가 함께 사라졌다. 이는 스타트업 탄생을 가로막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국내 선순환 벤처생태계에 심각한 장애요인이 됐다.
문 대표는 심사역 딜을 채택했던 배경으로 ‘신념’이란 단어를 꺼냈다. 그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현실적으로 숫자(재무제표)를 보면 답이 안 나오는 곳이 스타트업”이라며 “이들은 재무제표 분석이나 기술평가 영역 보다는 신념 영역이다. 기업가는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하고 투자자는 그 신념을 신뢰하고 투자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투자처 한곳(숨피)이 다른 기업에 인수됐지만 아직도 프로그램이 성공적이라고 단언할 단계는 아니다. 문 대표는 하지만 프로그램 도입에 상당한 만족감을 보였다. 심사역(벤처캐피털리스트) 경쟁력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을 대표적인 효과로 꼽았다. 초기 기업에 투자하다보니 회사 A부터 Z까지 관여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개인 자질이 업그레이드됐다는 분석이다. 심사역들이 투자자겸 멘토가 됐다는 것이다. 문 대표는 “재무제표와 사업계획서만 보고 투자하면 실패 확률이 높다. 마케팅이 왜 중요하고, 영업·고객관리를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심사역들이 알아야 한다”면서 “심사역들이 책에서 볼 수 없는 좋은 경험을 했다”고 평가했다.
벤처가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조직관리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내부 의사소통에 문제가 발생하고, 고객관리 심지어 협력사와의 관계에서도 오류가 발생한다. 문 대표는 “기업가가 이런 성장통을 겪을때 해결해줄 수 있는 투자자를 양성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용어>
◆심사역 딜(Deal)=벤처캐피털리스트(심사역)가 투자심의위원회(투심위)를 거치지 않고 투자결정을 내리는 제도. ‘심사역 투자 전권제도’라고도 한다. 보통은 심사역이 고른 벤처기업(투자회사)을 투심위 참여 위원 과반 또는 전체 찬성으로 투자여부를 결정한다.
김준배기자 j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