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쓰럽다. 출발선에서부터 논란을 불렀던 인터넷실명제를 끌어안는 모양새가 그렇다. 세상 사람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데 자신만이 그렇다고 우기는 모습과 많이도 닮았다. 안타깝다는 표현은 그래서 안쓰럽다가 됐다.
지난주에는 인터넷 실명제를 정부가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정부와 여당이 바빠졌다. 정부와 여당은 즉각 부인했다.
그런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취재와 기사 출고 프로세스상 그저 사실 무근인 기사가 나오기는 힘들다. 자신들이 검토한 안을 보도한 것인데도 전면 부인했다. 이미 당정에 보고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전형적인 물 타기다.
방통위는 NHN·다음·SK컴즈 등 주요 포털 정보보호 책임자들을 소집했다. 행안부도 업계와 교수 등 전문가들을 불러 개인정보 침해 위협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했다.
SK컴즈의 개인정보 유출이 컸다. 농협 전산망 사고도 그렇고 그전의 통신사, 기업의 개인정보 유출과 해킹 등 사건이 빈발한 것이 그렇다.
결론은 자명했다. 인터넷실명제의 단계적 폐지와 주민번호 민간사용 사전승인제가 그것이다. 개인정보 수집의 포괄적 동의제 정비 등도 해당된다.
왜 그럴까. 인터넷실명제는 주민등록번호의 수집을 부추긴다. 사실이다. 기업은 인터넷실명제 의무조항을 근거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물론 비즈니스 활용 목적이 크다.
악성 댓글 방지 차원이긴 하지만 정치적 목적이 컸다. 인터넷에 소극적인 여당과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수긍이 갈 만도 하다. 젊은 층과 진보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이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다.
인터넷이 무엇인가. 개방과 공유가 핵심 가치이자 사상이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이 같은 사상은 정치·문화·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중심적인 철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거대한 흐름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스마트폰은 특히 개방과 공유를 현실화시킨 정보통신 기술의 총아다. 스마트폰을 더욱 스마트하게 해주는 애플리케이션은 더 이상 개발독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정치권은 더 이상 개방과 공유의 가치를 거부할 수도, 개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됐다. 정치권만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기득권을 우려해 거부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그런데도 변화의 싹은 보인다. 한나라당 디지털정당위원장도 인터넷실명제의 폐지를 거론하고 있다. 아예 인터넷과 트위터 등 SNS를 이용한 선거운동 규제를 폐기하자는 얘기까지 내놓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개인정보 유출 위험성이 증가하고 있는 원인으로 인터넷실명제를 들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국내 포털사이트의 개인정보 유출 위험성이 큰 것은 인터넷실명제 의무화조항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주민번호를 대체하는 수단인 아이핀 역시 주민번호를 기반으로 발급되고 5개 민간회사에 주민번호 등 개인정보를 집적시키기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정부가 밝힌 아이핀 전면 보급과 주민번호 대신 본인 의사에 따라 변경할 수 있는 주민증 발행번호를 개인 식별 수단으로 활용키로 했다는 방안을 무색케 한다.
인터넷실명제가 답이 아님은 명확해졌다. 더 이상 고집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는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독점이 아닌 분산의 시대로 가고 있다. 정책 역시 규제와 통제로만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시대는 인터넷실명제의 정부 해법에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더 이상 인터넷의 부정적인 면만 볼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잣대만 고집할 일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박승정 통신방송산업부 부국장 sj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