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하게 요청 드리게 됐네요.(지경부 요청사항) 기초과학연구원에 기초원천을 포함해 50개로 설립되는 산업기술 분야 연구단 구성에 대한 제안을 기획재정부에서 요청했다고 합니다. (중간 생략) 현재 출연연의 기능을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직(연구단)으로 설립했으면 좋을 것 같은 아이디어입니다. 자료를 오늘까지 보내주세요.”
산업기술연구회 측이 지난달 25일 오후 5시쯤 산하 출연연구기관에 보낸 메일 내용이다. 국제비즈니스벨트에 들어가는 기초과학연구원 관련 사항을 담고 있다.
이 메일을 들여다보면 대략 정부 과학기술정책의 문제점 세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새로운 조직 제안을 단 몇 시간 만에 해치우겠다는 일에 대한 강한 ‘열정(?)’이 보인다. 새로운 연구단 구성에 (비록 아이디어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퇴근 전까지로 한정하면 1시간 내에 처리해야 한다. 출연연들이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추진을 왜 그렇게 겁부터 내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사실 연구현장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비일비재하다.
두 번째는 기관장 공모가 진행 중인 기초기술연구원의 연구단 설립에 재정부가 여전히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연연의 ‘시할머니’격인 지식경제부나 교육과학기술부가 ‘시어머니’ 산업기술연구회를 통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업무지시를 내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대부분 그 뒤에는 돈줄을 쥔 ‘왕할머니’ 재정부가 있다. 이렇게 출연연은 옥상옥 시집살이에 치여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 때 ‘출연연 옥상옥’ 얘기는 국감장의 단골 메뉴이기도 했다.
세 번째, 50개 연구단 설립에는 운영 계획만 있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지 아직까지 아무것도 없다. 정부가 지난 4년간 과학기술계에서 한 일이라고는 단지 운영계획만 있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 설립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메일의 바닥에 깔려 있는 과기정책 배경을 들여다보면 짜증이 더 난다.
출연연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것만 같았던 국과위에 과연 예산 편성권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구심마저 든다.
대표적으로 최근 국과위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강소형 조직개편의 핵심인 블록펀딩(묶음예산)은 여전히 국과위의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다. 재정부에 손을 벌려야 하는데, 아직까지 입도 뻥끗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 블록펀딩에는 올해만 최소 1조원 가량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재정부 측이 자신들과 상의도 하지 않은 사안이라며 뒷짐을 지고 있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출연연에서는 일반 연구사업 예산을 전용해 블록펀딩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강소형 연구조직 개편은 35일 천하로 끝났다. 국과위는 26개 출연연의 주먹구구식 조직개편을 추진하며 지질자원연구원과 에너지기술연구원에 일부 보강을 주문했다. 강소형 연구조직의 모델로 꼽혔던 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일부 조직명을 바꾸는데 반발, 버티고 있는 것을 빼곤 대부분 무더기로 패스됐다. 참 쉽다. 이제 8월 출연연내 조직의 문패만 바꿔 달면 되는 것이다.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은 지금 기체도 아니고, 액체도 아닌 ‘플라즈마’ 상태다. 출연연은 1시간 만에 조직개편 아이디어 만들어 내라면 만들어 줘야 하는, 그저 플라즈마 위에 떠있는 ‘종이배’ 같은 신세다.
어쩜 이것이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현주소다.
박희범 전국취재팀 부장 hb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