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54>

 CDMA 3단계 개발

 

 무(無)에서 유(有)를 잉태하는 연구개발은 형극(荊棘)의 길,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는 퀄컴과 1, 2단계 공동개발 과정을 거쳐 1993년 하반기부터 시스템 구현 작업을 진행했다. 이 시기는 CDMA 개발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셌다. ETRI와 퀄컴 간 불협화음도 터져나왔다. 상공자원부는 체신부가 국책사업으로 추진 중인 CDMA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TDMA 방식으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외국 장비업체의 로비도 치열했다. 국회조차 이 문제를 쟁점화했다.

 윤동윤 체신부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은 정공법으로 대응했다. 상용화 성공만이 해법이었다. 그는 장관직을 걸고 CDMA 개발에 전력투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CDMA 개발을 당초보다 2년 앞당겨 1995년까지 상용화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세상에 없는 CDMA 방식 이동통신시스템을 약속한 기간 안에 개발하는 것 이외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기술세계는 누가 선점하느냐가 관건이다.

 윤 장관은 매주 이인학 전파관리국장(데이콤 감사 역임)과 그 후임인 이성해 전파관리국장(정통부 정보화기획실장 역임, 현 큐앤에스 회장)이나 신용섭 과장(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등과 함께 ETRI로 내려가 CDMA 개발을 독려했다.

 ETRI도 비상이 걸렸다. 양승택 소장(ICU 총장, 정통부 장관, 동명대 총장 역임, 현 KAIST 초빙 석좌교수, KMI 회장)은 업무 우선순위를 CDMA 상용화에 두었다. CDMA 연구동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고 풀 가동하기 시작했다.

 양 소장은 매주 월요일 CDMA 개발 진도를 직접 점검했다. 그동안 단장을 통해 보고받던 업무상황을 실무라인을 통해 직접 보고받고 지시를 내렸다. 단장과 부장, 개발실장 등 연구진은 밤을 새우며 시스템 개발과 시험을 하고 매주 추진 상황과 문제점 등을 보고했다. 양 소장은 연구진의 어려움을 우선적으로 해결했다.

 그해 말 무렵, 서정욱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장(SK텔레콤 사장, 부회장, 과기부 장관, 초당대 총장 역임)이 CDMA 개발 실무책임자인 안병성 이동통신기술연구단장의 교체를 요구했다. 이를 놓고 관리단과 ETRI 간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ETRI에서는 당혹하고 불쾌한 기류가 역력했다. 진통이 계속되자 윤 장관이 중재에 나서 양 소장을 설득했다.

 윤 장관의 회고.

 “ETRI는 많은 연구를 하는 데 그 중의 하나인 CDMA 방식 이동통신개발 책임자를 바꾸는 일에 인색할 필요가 뭐 있어요. CDMA 상용화에 차질을 빚는다면 ETRI에 그 책임이 돌아갈 수 있어요.”

 그해 말 양 소장은 안 단장을 교체했다.

 양 소장의 말.

 “안 단장은 만 60세가 돼 단장 보직을 면하고 특별규정을 만들어 개인연구실을 주고 기초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했어요. 고생한 분들의 명예도 지켜주고 후진이 승진할 수 있는 자리도 만들어 주도록 했습니다(회고록 끝없는 일신에서).”

 1994년 1월.

 후임 단장에 박항구 교환기술연구단장(현 소암시스텔 회장)이 임명됐다. 박 단장은 과거 서 단장이 TDX 개발단을 맡고 있을 때 그와 호흡을 맞춰 교환기를 개발한 인연이 있었다.

 박 단장은 그간의 문제점을 분석해 내부 조직과 이에 따른 보완책을 마련했다. ETRI는 개발단 명칭을 이동통신연구단으로 변경했다.

 박 단장의 증언.

 “교환단은 그동안 이동통신기술연구단에서 이동교환기업무를 하도급받아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원화한 업무를 연구단으로 통합하고 그 업무를 담당하던 조직을 통째로 가져 오면서 명칭을 바꾼 것입니다. 양 소장에게 사전에 건의해 승낙을 받았습니다.”

 박 단장은 먼저 TDX 개발 성공체계를 참고해 CDMA 개발체계를 새롭게 정비하고 부장 인사를 단행했다.

 이동통신 교환연구부장에 이충근 부장(사업), 무선기술연구부장에 이헌 부장(현 텔에이스 사장), 이동통신계통연구부장에 한기철 부장(현 ETRI 책임연구원), 전파연구부장에 이혁재 부장(현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을 각각 임명했다. 이들은 환상의 콤비가 돼 기술개발에 가속페달을 밟았다.

 이충근 부장의 이동통신교환연구부는 이동교환기스템과 이동교환 하드웨어, 고속패킷 라우터와 프로세스, 이동호출처리 소프트웨어기술, 부가서비스소프트웨어기술, 이동망운영관리기술, 가입자관리 시스템 등의 개발업무를 담당했다.

 이헌 부장이 책임자인 무선기술연구부는 CDMA 성능분석과 기지국 무선접속 신호처리, 기지국 망구성방식, CDMA 기지국 서비스제어, 망관리, 기지국 트래픽 분석과 관리, 기지국 망정합 등의 연구를 담당했다.

 이동통신계통시스템부의 한기철 부장팀은 이동통신방식과 음성신호처리, CDMA 신호처리, 시스템시험과 성능분석, CDMA 시험환경과 이동전파분석, 개발환경과 체계 등에 관한 연구를 했다.

 전파연구부의 이혁재 부장팀은 이동전화 무선기술 연구사업을 진행했다. 기지국 무선기술과 이동전화 기술에 역점을 두었다.

 박 단장은 시스템 구조도 재설계했다. KCS 시험모델은 문제점이 발견돼 이동교환기와 기지국, 제어기와 기지국 간 처리 능력을 극대화하는 구조로 설계를 진행하고 명칭도 CMC-1으로 변경했다.

 박 단장은 지정개발업체 의견을 수렴해 업무를 세분하고 역할을 분담했다. 계획수립과 타당성 조사, 개발단계, 시제품제작과 시험 및 상용시험, 양산단계 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사항별로 정리했다. 그리고 데이터검색도구를 개발해 퀄컴 측에서 받은 각종 1, 2, 3차 기술문서와 소프트웨어 목록, 연구소의 문서 목록, 심지어 부품가격 등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자료를 저장했다. 이어 개발단계별 추진해야 할 업무와 단계별 작성해야 할 문서를 확정하고 사용자 요구사항 및 이동통신 시스템을 구성하는 기본 블록까지 자료로 정리했다. 이런 식으로 업무를 분담하자 그동안 비협조적이었던 개발업체들이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해 1월 박 단장은 파트너인 미 퀄컴사를 방문했다. 그동안 소원해진 관계를 해소하고 기술교류와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또 매월 양측이 번갈아 설계회의를 개최하고 기술전수도 차질없이 하기로 했다. 퀄컴사 방문에는 한기철 부장과 한영남 연구원 등이 동행했다.

 한기철 부장의 말.

 “전임 안 단장은 독자기술 의식이 강했습니다. 퀄컴과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어요.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탓에 문화적 차이도 있었고요. 이에 비해 박 단장은 개방적 리더십인데다 대인관계가 원만해 퀄컴과 기술전수와 업무 협조가 잘됐습니다.”

 그해 2월.

 ETRI와 퀄컴 간 3단계 기술개발 계약이 미 퀄컴에서 체결됐다. 이 계약은 시스템 하위 상세 설계 및 제어장치, 이동통신 교환기 개발 등이 목적이었다. 기술료로 505만달러를 지급했다. 5개월간 ETRI와 공동개발업체에서 연구인력 20명을 퀄컴에 파견하기로 했다.

 연구단은 CMS-1의 ETRI 설계분과 업체 분담설계의 제조, 실험실(STP) 제작에 집중했고 4월에는 대형 CMS-1을 완성했다.

 박 단장의 증언.

 “당시 실험실(STP)이 지하에 있었는데 그 방 입구에 ‘CDMA WAR ROOM(CDMA전쟁실)’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모든 연구진이 개발에 몰두 했습니다.”

 그해 6월 CMS-1로 시험통화에 성공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15년 만의 폭염이 전국을 찜질방처럼 달궜다. 그러나 ETRI 지하 1층 실험실은 냉기가 넘쳤다. 전쟁터에서 더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시험시스템에 설치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성능을 시험하고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하느라 무더위를 느낄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심지어 끼니도 연구실에서 해결하기 일쑤였다.

 하반기로 접어들자 연구단의 시험팀은 24시간 3교대로 나누어 기능별 시험을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실험실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미처 생각지 못한 복병이 등장하기도 했다. 장비를 24시간 가동하려면 다른 장비도 함께 가동할 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인력을 퇴근시킨 것이다. 그 이후 다른 장비운용 인력도 24시간 대기했다.

 동시다발로 인한 작동 중단사태는 상황판에 시험흐름도를 기능별로 작성해 문제점을 순차로 해결했다.

 연동시험과 관련해 수시회의를 열었다. 다음 회의 때 앞서 한 회의내용을 놓고 간혹 마찰이 빚어졌다. 옥신각신하다 회의 시간을 넘기는 일이 빈발했다.

 이를 본 A선임연구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녹음기를 갖다 놓고 회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회의내용에 대해 딴 소리를 하는 일이 사라졌다.

 ETRI는 신세기통신에 설치하는 시스템 최적화 작업을 지원했다.

 CDMA 연구개발 작업은 이후 문제점을 하나씩 극복해 상용화를 향해 달렸다. 만의 하나 제2 이동통신사업자가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에 상용화 기술을 내놓지 못하거나 시스템에 치명적인 기술결함이 인정되면 모든 연구성과가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ETRI는 세계 최초의 CDMA 상용화 장비인 KCS-1를 토대로 시험 제품인 KCS-2 시연에 성공했다. 1993년 12월에 기본시험 시스템 개발을 완료하고 1994년 말에 시범시스템 개발을 끝냈다. 1995년 말에는 상용, 시제품 개발을 끝냈다.

 1980년대 TDX를 개발했던 경험이 CDMA 첫 상용화의 주춧돌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 수많은 연구진의 땀과 열정이 뭉쳐 CDMA 세계 첫 상용화라는 ICT 거탑을 쌓게 된 것이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