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라면과 방사선

 2004년 2월 10일. 한국원자력연구소(소장 장인순)의 김재성 박사가 정부과천청사 2동 과학기술부 기자실에 등장했다. 김 박사 ‘팀’은 그날 3~4년 묵은 식물 씨앗(종자)에 방사선 0.5~16그레이(Gr)정도를 쪼였더니 “매우 잘 자랐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그는 “식물에 ‘잠재한 활성인자를 방사선으로 자극’해 생장을 촉진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연구에 쓴 방사선 조사량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방사선량의 100배, 사람 몸에 해를 입힐 수 있는 양의 100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놀라웠다. 김 박사가 설명한 바로는 식물이 가진 원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을 방사선으로 활성화할 수 있었다. 안전성과 관련한 기자의 우매한 질문에 “방사선은 잔류하지 않는다”는 대답까지 들었던 터라 믿음직했다. 특히 그가 “식물의 유전자 구조를 바꾸는 유전자 변형이나 (일부러)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방식과 다르다”는 설명까지 덧붙였으니 ‘아!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말 획기적인 연구결과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한국 내 여러 매체, 사실은 거의 모든 언론이 ‘재배용 식물에 적용할 수 있고, 안전성 논란이 뜨거운 유전자 구조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매우 획기적’이라고 소개했다. 더구나 ‘오랜 기간 저장했거나 폐기했던 벼·콩·배추·무·시금치·당근·호박·고추 등 여러 씨앗의 활용 가능성을 높이고, 비료와 농약 사용을 크게 줄일 수 있어 환경까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방사선이 생물에 미치는 정확한 영향이 밝혀지지 않아 또 다른 안전성 논란이 예상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죽은 것 같았던 씨앗이 방사선에 자극을 받아 생장하는 것은 적당한(?) 독극물이 되레 유용할 수 있다는 ‘호메시스(Hormesis)’ 현상 때문인데, 그게 왜 일어나는지 규명되지 않은데다 안전성도 입증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식물 등에 방사선을 쬔 사실을 소비자가 확인할 수 없는 것도 문제였다. 2003년 6월 잘 팔리던 한국산 라면이 스위스에서 퇴출된 이유다. 바야흐로 원자력에 대해, 방사능에 대해 다시 생각할 때다. 방사선은 잔류하지 않되 한 번 쬐면 ‘물체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형·손상’시킨다. “라면 봉지 좀 편히 뜯게 해주세요!”

 ey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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