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일본에서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로 살아가는 방법은 ‘종말의 경치’와 닮았다. 슬픔과 광기로 가득 찬 이방인의 피를 수혈받은 듯 붉은 달이 주홍글씨처럼 불길하게 자리잡는다. 시작부터 죽음과 맞닿아 있는 연극 ‘해바라기의 관’은 작가 유미리의 대부분 작품들이 그렇듯 그녀의 경험을 토대로 한다.
수입의 대부분을 경마에 탕진한 아버지, 카바레에서 일한 어머니의 가출, 차별과 무시, 따돌림, 자살 등 자극적인 내용들이 잔혹함보다는 거대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신주쿠양산박 특유의 미학, 그로데스크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무대 위의 배우들이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연기한다는 데서 극대화된 효과를 얻는다. 관객은 언어를 잃어버린 그들의 ‘말’을 자막을 통해 이해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관객과 연극 속 인물들은 비슷한 경험과 동질감을 느낀다.
신주쿠양산박의 이전공연 ‘도라지’에서 고종과 명성황후, 홍종우와 김옥균 등 역사의 인물들이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대사를 전하는 것 역시 예상되는 이질감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신주쿠양산박이 가진 이미지의 힘보다 묵직한 울렁거림으로 다가온다. 역사극을 보며 느끼는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애국심과는 다르다. 한국인이 숙명처럼 지니고 있는 일본에 대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반감이 죽어가는 ‘일본어의 명성황후’를 만났을 때 서러움과 분노가 동반된 아이러니함을 낳는다.
언어를 잃어버린 자는 무엇으로 소통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가. 어머니의 화장대와 ‘다녀오셨어요’만을 반복하는 구관조, 정지해 있는 자전거바퀴, 창밖의 여자, 돌아와요 부산항에, 사란라프 하모니카 등 침묵하고 불발되는 소통의 상징적 요소들은 고통에 대한 호소보다 절실하다.
경계에서 늘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재일교포의 내면이 구체적 소재들로 재현된다. 영민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과 영옥 등, 소외의 삶에 맞서려는 적극적 의지보다는 체념의 상태에 놓인 인물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돌파 불가능한 환경에서의 지난했던 삶이다.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너무나도 묻고 싶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부정확한 발음으로 살란라프 하모니카(사랑합니까)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체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유전적 그리움이 잔인하면서도 서정적으로 묘사된 무대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찬란하게 변한다. 가득한 해바라기가 붉은 달보다 강렬하다. 온 몸의 힘을 끌어 모아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정확히 발음하는, 발음하기 위해 노력하는 영민의 마지막 절규가 관객의 가장 깊숙한 곳에 와 박힌다. 우리는 결국 그들의 모든 말들을 자막 없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대 위의 모든 인물들이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라고 물을 때, 그 물음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독특한 연극적 세계와 미학으로 뚝심 있는 행보를 하고 있는 신주쿠양산박과 스튜디오 반의 한일 공동 프로젝트 노력은 늘 반갑고 고맙다.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아는 신주쿠양산박의 2011년 한국 공연에 박수를 보낸다.
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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