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정부 요란하더니 결국은 말뿐

서울 한 기업에 취업하려는 지방대학생 A씨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입사에 필요한 성적증명서와 졸업증명서를 출력했다.

우편으로 보낼까 하다가 직접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서류 원본은 전자문서로 돼 있지만 기업이 증명서를 종이문서로 제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 관계자는 "성적증명서 등의 전자적 위변조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주민등록등본 등 대부분 민원서류도 마찬가지다.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민원24가 취급하고 있는 온라인 민원서류는 1800종에 달한다. 하지만 정작 이를 필요한 공기관이나 민간기업에 제출할 때는 종이로 출력해야 한다.

행안부 관계자는 "민원서류이기 때문에 개인이 다운받아 저장하면 위변조 우려는 물론 필요한 곳에 무한대로 사용하는 오남용 등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위변조와 오남용 등의 이유 때문에 전자문서 유통이 반쪽짜리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최근 5년간 종이 소비는 연평균 1.2% 소폭 감소한 데 비해 복사용지, 컴퓨터용지 등 정보인쇄용지 소비는 오히려 연평균 15.4% 급증했다. 정부가 야심차게 녹색성장 일환으로 추진하는 `페이퍼리스(Paperless)` 정책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그동안 3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전자정부 등 전자문서 확산을 추진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라면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는 사이 종이문서를 사용하며 운송ㆍ분류ㆍ보관ㆍ검색ㆍ폐기 등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 연 28조원이 줄줄 새고 있다.(정부 추산)

금융회사 중 처음으로 공인전자문서보관소로 지정된 하나금융지주 자회사인 하나INS.

보관용량 48테라바이트로 전자문서 연 2억3800만장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회계전표, 여신서류, 대출약정서 등 종이문서도 전자파일과 함께 보관 중이다.

작년 말 하나INS는 골칫거리인 종이문서를 폐기해도 되는지 지식경제부에 정식 문의했다. 지경부 담당자는 전자거래기본법에 따라 종이를 전자문서로 변환하면 폐기해도 무방하다고 회신했다. 그러나 하나INS는 내부 격론 끝에 일단 종이문서를 폐기하지 말고 갖고 있자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우선 안전하게 하자는 것이다. 전자문서 전환으로 연 30억원의 비용절감을 기대했으나 이중 보관으로 비용절감 효과가 연 15억원에 그치고 있다.

하나INS가 금융자료를 이중으로 보관하는 이유는 바로 법적 제도 정비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민사소송법이다. 민소법에는 `소송당사자나 재판부가 원본 제출을 요구하면 따라야 한다`는 규정을 갖고 있다.

금융위원회에서는 만약 금융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전자문서가 증거로 채택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며 금융사 안전을 위해 종이문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칫 전자문서로는 금융회사가 패소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법조계에서도 전자문서를 증거로 채택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원본제시 요구 사례가 단 1~2건이라도 있다면 개정이 불가하다는 것. 공인전자문서보관소에 전자문서를 보관하면 위변조가 불가능하지만 법적으로는 종이원본이 필요한 셈이다.

지경부 관계자는 "민소법 규정을 바꾸기 위해 법무부와 협의 중이지만 쉽지 않다"며 "우선 전자거래기본법에 전자문서가 소송절차의 문서제출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을 입법예고한 상태"라고 말했다.

상거래에서 발생하는 각종 종이원본을 최소 5년 이상 보관하도록 돼 있는 상법 시행령도 그대로 살아 있다.

상법에서 종이원본을 전자문서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개정작업도 이제야 진행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상업장부 등 서류보관시 일정요건하에 전자보관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전자거래법과 혼동이 있다는 지적에 따라 문구 조정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 국세청 `전자연말정산` 성과…교육·행안부는 눈치만

직장인 B씨는 연말정산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국세청 간소화서비스를 이용해 클릭 몇 번만으로 회사에 제출했다.

소득공제자료가 전자문서로 제공되기 때문에 일일이 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없었다. 회사도 이번부터 국세청과 연계된 프로그램을 이용해 직원들의 소득공제 전자문서를 그대로 국세청에 클릭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이번에 경찰청을 제외한 모든 부처가 전자문서로 연말정산을 제출했다"며 "이 시스템으로 연간 1억5000만장의 종이 절감이 가능하고 매년 90억원의 돈이 절약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국세청 입장에서도 증빙서류 5년 의무보관을 CD로 바꾸면서 간편하게 해결했다.

소득공제 전자문서는 타임스탬프 기능을 탑지해 위변조 우려를 말끔히 씻었다. 김동현 타임스탬프솔루션 대표는 "타임스탬프는 전자인감으로 문서 변조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진본확인` 문구가 `변조`로 바뀌기 때문에 이번 연말정산 전자문서 유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IT기술의 발달로 종이문서보다 전자문서 위변조가 더 어렵다는 얘기다.

행안부가 운영하는 민원서류 정부포털도 똑같은 위변조 방지를 위한 타임스탬프 기술을 갖추고 있지만 유통에 대한 입장은 다르다. 행안부 관계자는 "국세청 연말정산은 민간이 정부에 제출하는 1대1 유통이라 안전하지만 각종 민원서류는 정부로부터 발급받아 민간에게 유통시키는 것으로 법적 효력과 보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매일경제 전병득 기자/김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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