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는 블랙박스다.”
기자가 만난 한 대학교수는 ‘속을 알 수 없는’ IT 솔루션을 이렇게 비유했다. 핵심 알고리즘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 해외 기업의 제품은 블랙박스와 같다는 것이다. 속을 모르다 보니 사실 기업들이 구입할 때는 온갖 대접을 받으며 주인행세를 할지 몰라도 구입 후에는 칼자루를 벤더에게 쥐어주게 된다. IT제품은 마음대로 고쳐서 사용할 수도 없는 애물단지가 되어 안방마님 노릇을 하는 것이다.
국내 주요 그룹사들이 도입하는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이 SAP, 오라클 등 대표적 두 외산 패키지로 국한돼 있어 이 같은 문제를 부추긴다. 그룹사가 도입하는 ERP 제품에 협력업체들도 따라 나서면서 선택의 폭은 두 제품으로 압축되고 있다.
최근 몇년 간 대형 해외 솔루션 업체들이 인수합병으로 덩치를 부풀려나가자 특정 벤더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커지고 있다. 값비싼 외산 패키지를 도입할 여력이 있는 대기업 고객사에서 종속성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한 제조기업 IT 관계자는 “사용하던 소형 패키지 제조 기업이 오라클에 인수되고 나니 오라클의 높은 유지보수율 정책에 맞춰 해당 패키지의 유지보수 금액도 덩달아 뛰어올랐다”며 “결국 주요 기간계부터 연계 시스템까지 모두 일부 대형 외산 기업들의 제품으로 도배되다시피 하니 금액뿐 아니라 기술 종속성 문제도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많은 기업들이 통합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대세인 만큼 구축형 소프트웨어 도입 시 종속성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종속성과의 ‘전쟁’을 선포한 기업들도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말부터 벤더 종속성을 낮추기 위해 멀티벤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모든 가능한 솔루션 후보 리스트를 마련하고 선택 사용하도록 바꿨다. 전사적자원관리(ERP) 등 핵심 시스템의 경우 이미 특정 솔루션을 기반으로 구현된 상태지만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 웹애플리케이션서버(WAS) 등은 후보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제품 중 2∼3개를 도입했다. LG전자는 이 비중을 확대해나간다는 방침이다.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통합 정보시스템 구축을 가속화하는 우리 글로벌 기업들이 오히려 애물단지를 키우는 일을 초래해서는 안될 것이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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