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짝퉁 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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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년 전 일이다. 국내 한 세트업체가 전자제품 출하 직전 마지막 성능시험을 하는 과정에서 3000대의 불량품이 발생,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불량률을 PPM 단위(제품 100만개를 생산할 때 불량품의 수)로 통제하고 식스시그마 운동을 전개하던 이 업체 측에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원인은 손톱 크기의 전력관리 반도체에 있었다. 영국에서 들여온 유명 브랜드의 전력관리 반도체 중 3000개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조사결과 불량 반도체는 제조사의 정식제품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교묘히 날조된 가짜 제품이었다.

 이전의 사례로 볼 때 가짜 반도체라 하면 컴퓨터용 중앙처리장치(CPU)나 D램 모듈의 리마킹 제품을 의미했다. 완제품을 사들여 제품 표면에 새겨 있는 본래의 클록 스피드 표식을 지우고, 그 위에 한두 단계 높은 클록 스피드를 레이저로 정교하게 다시 마킹하는 수법이 주류를 이뤘다. 주로 유통업체 선에서 이뤄진 경범죄 수준이었다.

 그러나 6년 전 전력관리 반도체 소동은 내용이 달랐다. 리마킹 정도가 아닌 반도체 제조업체가 웨이퍼 가공 단계부터 패키징 작업까지 일괄처리한 후 유명 브랜드를 마킹해 속여 파는 지능화한 중범죄였다. 특정 브랜드의 반도체를 겨냥해 웨이퍼 단계부터 복제한 첫 사례로 간주된다. 당시 내셔널세미컨덕터, 아나로그디바이스 등의 브랜드가 이른바 짝퉁 반도체 업체의 표적이 됐다.

 짝퉁 반도체로 인한 피해는 우리 반도체 업체라고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한 주문형반도체(AISC) 업체는 대만과 중국에 새로운 거래처를 뚫기 위해 심혈을 들여 개발한 제품 샘플을 보냈다가 거래처 확보는커녕 이듬해 ASIC만 통째로 복제당하는 봉변을 당했다. 업체가 직접 나서 복제 경로를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데다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비싼 수업료’를 낸 셈치고 업체 내부적으로 보안을 강조한 것이 후속조치의 전부다.

 세계 최고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한 국내 메모리제조 업체들도 예외일 수 없다. 재고 물량이 넘쳐나는 비수기엔 잠잠하지만 공급이 달리는 성수기엔 아시아권 국가 곳곳에서 위조된 자사 브랜드 D램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같은 피해사례는 십수년째 2∼3년 간격으로 반복돼 왔으며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대 인류문명에 커다란 혁신을 가져다 준 반도체 기술은 어떠한 이유에도 보호돼야 한다. 반도체는 지식재산권의 집합체다. 1958년 집적회로(IC)를 처음 개발한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츠의 잭 킬비는 40여년의 시간이 흐른 2000년에야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 공로를 반드시 기려야 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한림원의 현명한 결정이다.

 한국·미국·유럽·일본·대만·중국 6개국의 단속기관이 오는 21·22일 양일간 제주도에서 짝퉁 반도체 근절을 위해 머리를 맞댄다. 메모리 강국으로 우뚝 선 우리로선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다. 반도체 불법복제방지 전문가 회의로는 이번이 처음이라니 더욱 기대가 크다. 부디 일회성 행사가 아닌 대의실현을 위한 시발점의 의미를 부여해 제대로 된 공조체계를 구축하기 바란다.

 최정훈 국제부 차장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