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OBIZ+] Case Study-단순한 IT시스템이 아닌 `경영혁신`의 화두로

 밤낮 없이 연구원들로 북적거리는 삼성전기 수원사업장의 거북선센터. 세계 최초의 제품들이 만들어지는 산실이다. 얼마 전 세계 최초 신개념 3세대 안테나도 바로 이 곳에서 탄생했다. 연구원들은 각종 측정기, 복잡한 첨단 장비들과 함께 며칠 밤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지난 2월 2일 아침 9시. 영업, 물류, 제조, 구매, 개발 등 전 사업부 직원이 마주 앉았다. 센터 창립이래 가장 많은 직원들이 모였다. 그것도 실험도구가 아닌 필기도구를 들고 말이다. 삼성전기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한 공급망관리(SCM) 태스크포스(TF)팀은 이렇게 시작됐다.

 ◇불가능도 가능하게 한 톱다운 리더십=지난 1월. 박종우 사장은 취임 후 첫 회의에서 “스피드, 효율, 이익 경영을 통해 강한 삼성전기를 만들 수 있는 길은 SCM 뿐”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은 술렁거렸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전체를 감쌌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잠시였다. 2월부터 시작된 3개월간의 TF 활동은 삼성전기에 혁신의 바람을 불어 일으켰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다시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재고일수가 반으로 줄었고 수요예측 대비 출고실적과 생산계획 기준 생산능력은 20% 가까이 향상됐다.

 “3개월이요? 해보겠습니다.” 이 한 마디로 SCM TF를 맡은 후 주말도 없이 달려온 박흥옥 경영정보그룹장은 “우리도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며 스스로도 믿기 어려워했다. 그동안 삼성전기에 SCM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직원들은 SCM을 단순히 하나의 시스템으로 여겨왔다.

 박 팀장은 “SCM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룰을 만드는 것과 실행이 병행해야 했고, 직접 실행을 이끈 톱다운 리더십이 열쇠가 됐다”고 강조한다. 이는 박종우 사장의 의지이기도 했다.

 큰 밑그림은 박 사장이 그렸지만 각 사업부장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마치 각기 다른 회사를 경영하듯 4개의 사업부별 제품에 특화된 B2B형 SCM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사업부별 산하 SCM 조직이 꾸려졌고, 전사 공통 프로세스 및 사업부별 특화된 프로세스에 따라 각 사업부장이 직접 TF를 책임질 수 있는 조직체계도 구성했다.

 ◇제조 현장의 실행력 높이는데 주력=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SCM은 시스템이다’라는 의식부터 바꿔야 했다. 박 팀장은 “SCM을 단순한 IT가 아닌 ‘경영혁신’ 활동으로 여기도록 현업을 설득하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며 “이를 위해 현업에게 프로세스의 문제점 파악과 개선을 혁신의 툴과 화두로 삼을 수 있도록 설득했다”고 말했다. IT 인력으로만 SCM팀을 꾸리던 예전과 달리 각 부문별 핵심 인력이 직접 참여해 TF가 추진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3개월 동안 4500여명의 직원이 SCM 교육을 받았다. 경영정보그룹 4명이 프로세스 파악을 통해 각 사업부의 프로젝트매니저(PM) 역할을 수행했다. TF에 참여한 전 사업부의 업무별 담당자는 몸소 느낀 프로세스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최선의 프로세스를 도출했다.

 이렇게 4개 사업부, 총 155개 프로세스의 개선 과제가 도출됐다. ‘영업이 예측하지 않은 물량은 생산도, 할당도 하지 않는다’는 룰 등 SCM 실행력을 뒷받침할 강도 높은 78개의 룰을 재정립했다. 개선된 프로세스의 효과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KPI)도 개발했다. 101개의 용어도 표준화했다. 개선 활동들이 재고일수, 리드타임, 완성 준수율 등 지표로 반영되도록 했다. 이 지표는 향후 박 대표가 임원 평가에도 반영하기로 했다.

 삼성전기는 우선적으로 제조현장의 실행력을 높이기 위한 3일 확정 체제를 확립했다. 계획된 3일치 물량은 반드시 엄수하도록 했다. 자재 수급 및 생산 지표를 측정해 문제점이 생겨도 즉각 발견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했다. 전자 간판도 도입했다. PC 화면상에서 생산 담당자가 생산 계획을 로트(LOT) 단위로 입력하면, 계획에 맞춰 직전 공정 제품 및 재료가 정확히 준비, 공급될 수 있도록 했다. 디지털 환경을 이용해 가시성을 최대한으로 높인 것이다.

 ◇B2B형 수요예측 능력 높일 것=B2B형 SCM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는 일이다. 채찍효과(Bull-Hip effect)에 따라 소비자 접점에 있는 완제품 기업보다 부품 기업이 느끼는 수요 변화폭이 더 크기 때문이다. 적층세라믹콘덴서(MLCC)의 경우 3000가지 종류가 있는데, 한 제품당 수 개의 거래선과 연결돼 있다. 월 생산량이 200억개에 이르니 수요 예측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박 사장은 완고했다. 판매 법인에서 모든 업무를 완결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미미했던 판매 법인의 역할이 급부상했고 머리 속과 책상 위가 아닌 현장의 데이터를 통해 수요예측을 높이기 위한 영업부문의 피나는 노력이 시작됐다. 박흥옥 팀장은 “고객사의 구매 정보에서 나아가, 생산, 판매, 마케팅, 연구개발(R&D) 단계까지 연계된 수요예측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면서 “수요예측의 패턴을 찾아내기 위한 거시적 지표 분석 등 과학적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기는 이러한 수요예측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내년 이후 중점 과제로 삼고 있다. 수요예측을 강화하기 위해 현재 20여개 고객사와 시스템 연결을 통해 발주, 납품 예약 정보 등을 실시간으로 주고받고 있으며 이를 확대할 계획이다. 물류 최적화를 통해 벤더중심재고관리(VMI) 방식의 재고 관리 비중을 낮추고 100% 납기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할 전략이다.

 ◇일주일마다 전 세계 법인이 한 자리에=과거 한번뿐이던 주간 판매생산 회의는 세 번의 회의로 나눠졌다. 주 단위 프로세스의 핵심 의사결정은 전 세계 법인이 한 자리에 모여 생산과 판매 계획을 세우는 사업부 단위의 글로벌 운영회의에서 이뤄진다.

 일주일에 한번씩 밤잠을 포기한 해외 법인장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영상을 통해 참여하고, 사업부장이 주관해 향후 16주간의 계획을 짠다. 다가오는 한 주에 대해서는 일 단위 생산 계획 수립에 3일 확정 체제가 적용, 설비 단위 작업지시에 이르는 실무 차원 의사결정이 내려지도록 했다.

 실무진들이 하던 회의에 책임자급이 참석하는 것 만으로도 회의의 영향력은 매우 높아졌다. 지난 4월부터는 임원급이 직접 참석하고 있다.

 최근에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보이는 시스템을 만들라’는 박 사장의 요청에 따라 의사결정을 위한 화면도 대폭 개선했다. 하나의 화면에서 실적 및 매출 등 정보를 동시에 비교하고 클릭 한번으로 원인과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사용자인터페이스(UI)도 개선했다. 이 화면의 실시간 데이터들은 글로벌 운영회의 자료로 활용된다. 전 세계 임원들이 하나의 화면과 지표를 동시에 공유하며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강력한 힘이 됐다.

 이와 함께 삼성전기는 총 86개의 시스템 인프라 통합을 위한 글로벌 전사적자원관리(ERP)도 구축 중이다. SCM을 통해 개선할 155개 프로세스가 글로벌 ERP의 목표(To-Be) 모델과 연계돼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 팀장은 “이제 겨우 한 걸음 뗀 것”이라며 겸손해 했지만 “앞으로 변화할 삼성전기를 기대하라”고 미소를 지었다. 미소 한 켠에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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