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 그때 그시절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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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1970년 9월 1일, 전화 가입권을 남에게 넘길 수 있는 전화는 흰색, 그렇지 않은 전화는 푸른색으로 구분하는 제도가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제도였는데, 이는 합리적인 전화 공급을 위한 조치였다.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전화 수요는 계속 늘어났다. 하지만 수요에 맞는 공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화 가입 경쟁은 매우 치열해졌다. 전화를 놓기 위해 청탁을 하고 전화 가입권이 비싼 값에 팔리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났다. 전화 임대업도 생겼고 매점매석으로 전화 가격을 조작하거나 전화를 담보로 한 사채도 등장했다. 전화가 꼭 필요한 사람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기통신법 제24조를 개정해 전화 가입권을 남에게 팔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양도가 가능했던 전화는 흰색으로, 새로운 법에 따라 사용권만 있게 된 전화는 푸른색으로 구분했다. 백색전화는 새로 가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했다. 이와 함께 청약 우선순위 제도도 시작했다. 전화 가입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순서를 정해둔 것이다. 청약을 하면서 일정한 금액을 미리 내게 하고 우선 순서에 따라 전화를 설치해 주는 제도였다.

 ②1972년 3월 25일부터 체신부는 공중전화 시간을 3분으로 제한했다. 전화 교환 기계실에 타이머를 장치해서 통화 시작 후 3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끊어지도록 했다. 오랜 시간 동안 통화하는 일을 막아 통화 완료율을 높이고 보다 많은 사람이 공평하게 공중전화를 이용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치로 차례를 기다리느라 공중전화 앞에 길게 줄을 선 풍경은 점차 줄어들었다.

 한편 1961년에 680대밖에 없었던 공중전화는 1966년에 2588대로 늘어났다. 해마다 평균 380대씩 늘어난 셈인데 대부분이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에 설치됐다. 체신부는 전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변두리 지역에도 공중전화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1971년 말 전국의 공중전화는 모두 7802대로 첫해에 비해 거의 세 배나 증가했다.

 ③분단 4반세기 만에 남북 간 대화의 길이 트였다. 1971년 9월 20일에 열린 남북 적십자 제1차 예비회담에서 남과 북은 직통전화를 개설하기로 합의했고 이틀 뒤인 22일에 판문점 안 자유의 집과 판문각 사이에 전화선이 설치됐다. 이로써 1945년 단절됐던 남북의 통신이 재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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