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명예회복 나선 일본…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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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10년. 일본에는 암흑의 시기였지만 한국엔 기회와 도전의 시기였다. 일본이 극심한 장기침체를 겪고 있던 이때 삼성전자는 반도체(메모리) 투자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92년에 세계 최초로 64MD램을 개발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세계 최초 개발’이라는 타이틀을 내놓은 적이 없다. D램이나 S램, 플래시메모리 같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세계 점유율도 1위를 차지했다. 디스플레이 분야도 마찬가지다. LCD는 삼성전자와 LPL이, PDP는 삼성SDI와 LG전자가 각각 세계 1, 2위를 차지하며 세계 시장을 호령한다. 끊임없는 연구개발(R&D)과 앞서가는 설비 투자에 이은 양산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한국에 선두자리를 내준 일본 업체들이 자존심 회복을 위해 칼을 빼들었다. 도시바는 지난해 말 주력 제품인 플래시메모리 공장 증설을 위해 1조4000억엔을 투입하겠다고 선포했다. 생산능력을 지금보다 네 배로 확대해 다시 한번 세계 최대의 플래시메모리 업체로 올라서겠다는 의지다. 디스플레이 분야도 마찬가지다. 마쓰시타는 총 2800억엔을 투입해 연간 1000만대 규모의 PDP를 생산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장을 아마가사키에 짓고 있다. 사카이에 세계 최대의 LCD 공장을 건설 중인 샤프도 최근 기존 가메야마 공장의 8세대 라인의 증산계획을 종전 계획보다 6개월 빠른 7월로 앞당겨 삼성전자와 LPL을 압박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LPL도 이미 8세대 라인 신·증설 투자에 들어간 상황이어서 단기간에 LCD 분야에서 샤프가 주도권을 잡기는 힘들겠지만 위협적인 것만은 확실하다.

 일본 업체들은 독자적인 공세와 함께 연합작전도 불사한다. 최근 마쓰시타와 캐논, 히타치제작소가 발표한 LCD사업 분야 포괄 제휴도 그중 하나다. 마쓰시타와 캐논이 각각 히타치제작소의 대형 LCD 자회사와 중소형 LCD 자회사를 단계적으로 산하로 끌어들이는 것을 골자로 한 이번 제휴로 마쓰시타는 샤프가 건설 중인 사카이 공장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형 LCD 공장을 지어 내년부터 가동한다는 전략이다. 샤프와 도시바가 각기 보유한 LCD패널과 반도체를 교차구매하기로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2010년까지 샤프가 도시바의 LCD TV용 시스템 LSI를 50% 구매하는 한편, 도시바는 샤프가 생산하는 32인치 이상의 TV용 LCD모듈을 40%가량 구매하기로 한 것이다. 단순한 제휴 수준을 넘어 피를 섞는 일종의 융합전략이다. 평소에는 치열한 경쟁자면서도 국익을 위해 끈끈하게 뭉쳐 큰 힘을 만들어내는 일본 특유의 대목이다.

 디스플레이산업협회를 만들어 디스플레이 산업의 동반성장을 꾀하겠다고 했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우리로선 부러울 따름이다. 8세대 LCD 유리기판 크기를 표준화하는 데엔 성공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협력사 간 장비 교차구매는 이뤄지고 않았다. 혈맹은 고사하고 장을 만들어 놓고도 거래를 못 하게 하는 분위기만 있다. 특허 분야에서 협력하고 수직계열화를 타파하고 공동개발을 하겠다고 했지만 공허한 메아리로만 울린다. 줄 세우고 편가르기하는 정서는 여전히 존재한다.

 불확실한 정치 상황도 그렇다. 가뜩이나 D램 경기가 침체돼 업체들이 설비투자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이런저런 특검은 투자 의욕을 더욱 위축시킨다. 진실을 밝혀내 잘못된 부분에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겠지만 시간을 오래 끌면 곤란하다. 모처럼 잡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주도권을 대기업의 이해 관계나 정치 논리로 잃기엔 너무 아깝다.

 주문정기자@전자신문, mjj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