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1982년

 1982년은 격동의 시기였다. 80년 ‘서울의 봄’ 이후 군사정권의 강압이 날로 심해지고 있던 때였다. 대학교의 냄새는 매캐한 최루탄으로 대변됐고 시위는 더이상 기사거리가 되지 않던 시기였다.

때마침 단시간 최대 사상자를 부른 사건도 발생했다. 경남 의령의 우순경 총기난사사건이었다. 55명이 하룻밤 새 ‘불귀의 객’이 됐다. 영문도 모른 채 난사한 총탄에 맞아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기쁜 일도 있었다. 한민족의 염원을 담은 88서울올림픽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또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중국에 이어 종합 2위에 오르면서 기개를 떨쳤던 해기도 하다. 프로야구가 개막돼 백구의 향연이 펼쳐졌다. 군사정권이 국민의 시선을 정치 밖으로 돌리기 위해 시작됐다고 하지만 프로야구는 지금까지 최고의 스포츠 빅이벤트로 자리하고 있다. 또 그해 야간통행금지의 사이렌이 없어져 한결 부드러운 밤거리를 맞이할 수 있었다.

82년은 지금의 40대에게 아련한 향수가 묻어 있던 때기도 하다. 우스갯소리로 ‘똥파리’ 학번이라는 82학번이 캠퍼스에 첫발을 내딛었던 때다. 현재 중추세력으로 사회를 움직이는 세대다. 역경을 이긴만큼 강인한 정신력과 의지로 한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해는 IT의 태동을 맞던 시기기도 하다. 일부 선각은 한국의 성장동력이 IT에 있음을 알고 본격 투자에 나섰다. 흑백TV에서 컬러TV로 전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IT산업의 심지에 불꽃이 붙은 셈이다.

전자신문도 그해에 창간됐다. 아날로그 시대에서도 첨단을 향해 달렸고 디지털 시대에서는 선도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IT란 말이 생소하던 때부터 일상화되기까지 동고동락한 25년이었다. 사반세기 만에 IT는 한국 경제의 절반을 책임지는 중요한 산업이 됐다.

IT의 미래 25년은 지난 25년보다 더 빠른 속도, 더 큰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 추측이 불가할 정도의 변모된 미래사회의 중심에 IT가 있기 때문이다. 한부분의 산업에서 절반의 산업으로, 다시 산업에서 생활로 바뀌는 발전이 거듭되고 있다. 그래서 물과 공기와 같은 존재로 IT가 존재하는 한 1982년은 영원히 기억될 해다.

이경우기자@전자신문, kw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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