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불량 제품은 범죄나 다름없다. 이제 양 위주의 경영을 과감히 버리고 질 위주로 간다”고 선언했다. 모두가 외형 성장에 도취해 있을 당시 이 회장은 찌든 구태를 벗고 완전히 새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주문했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유명한 이 회장의 ‘신경영’ 선포였다.
신경영 철학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었다. “처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라”고 강조한 이 특별한 선언은 삼성 임직원들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신경영은 ‘나로부터 변화’를 시작으로, 양적 성장에서 탈피해 궁극적으로는 삼성을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21세기 초일류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의지였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지금 삼성전자는 매출 80조원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쉴 틈이 없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지난해 ‘창조적 경영’을 선언하고 또 한번 업그레이드를 시도하고 있다. 삼성전자를 한국이 아닌 ‘세계 대표 IT 기업’으로 만들기 위한 창조 경영의 숨가쁜 질주에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이유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지난해 6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에게 ‘느닷없이’ 창조적 경영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삼성 영빈관인 승지원에서 독립계열사 CEO 14명과 함께 각종 경영 현안을 논의하는 관례적인 자리였던 터다. 창조 경영을 주문한 이 회장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삼성은 국내 선두 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기 때문에 다른 회사를 벤치마킹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야 한다. 세계적인 선두그룹에서 시장을 개척할 줄 아는 것이 창조 경영”이라고 강조했다는 후문이다.
지금 삼성전자를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확고부동한 1위인 반도체 D램을 비롯해 TFT-LCD, TV, 모니터 등 총 18개 주요 전자제품 시장에서 ‘넘버원’ 자리에 올랐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7.5%(2005년)를 삼성전자 단일 기업이 벌어들이기도 했다. 이제 삼성전자는 회사 차원을 넘어 삼성그룹, 나아가 국내 IT 산업의 미래까지 밝혀야 하는 책임감까지 떠맡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고속성장을 자축할 새도 없이 삼성전자가 창조 경영을 향해 달리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지난해 9월 미국 뉴욕 맨해튼 소재 ‘삼성전자 체험관’에 들른 이 회장은 다시 한번 창조 경영의 고삐를 죄였다. 삼성전자 사장단과 함께 해외경영전략회의를 갖는 자리에서 그는 “뉴욕은 세계 최고의 디지털제품이 경쟁하는 각축장이며, 뉴욕의 최고급 소비자들로부터 인정받아야 진정한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창조 경영의 대표적인 성과물로 거론한 제품은 국내 독자 통신기술로 개발한 와이브로와 40나노 32기가 낸드플래시 개발을 가능케 한 ‘CTF’ 기술, 세계 LCD TV시장 선두로 올라선 ‘보르도 TV’. 이 회장은 “창조적 경영을 정착시키려면 우수인력 채용과 육성, 과감한 연구개발 투자가 필요하다”면서 “과거처럼 남의 것을 복제해서는 안되고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삼성만의 고유한 차별성과 독자성을 창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창조 경영 선언 후 삼성전자의 또 한번 달라진 모습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삼성전자가 후원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팀’.
지난 2005년 4월 스폰서십 계약을 한 뒤 불과 1년새 영국 내 삼성전자 브랜드 인지도는 배 가까이 늘었고, 현지 시장 휴대폰 판매실적 역시 갑절가량 증가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첼시 홈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한 뒤 “세계 최고 선수들이 뛰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우수인력들이 펼치는 창조적 플레이의 경연장”이라며 경영에도 ‘프리미어리그식 창조경영’을 도입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최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동의 외딴 섬 ‘두바이’는 창조 경영의 또 다른 실체다.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두바이에 건설 중인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 두바이’ 공사 현장을 찾아 “미래 비전을 가진 셰이크 모하메드 국왕이 두바이를 세계인이 주목하는 곳으로 새롭게 창조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설파했다. 셰이크 모하메드 국왕은 냉철한 통찰력과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상상력,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천력 등 3대 리더십을 두루 갖춘 ‘두바이의 CEO’로 통한다.
창조경영을 실천하기 시작한 뒤 삼성전자에 미래는 ‘예측 불가능’이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급변하는 세계 시장 환경에서 어떤 기술과 어떤 제품이 세계인들을 사로잡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새해에도 삼성전자는 “미래는 예측하지 않는다. 다만 창조할 뿐이다”는 경구를 가슴에 아로새기고 한걸음 더 나아가는 모습이다.
*존경받는 기업 세계 3위...브랜드가치 20위 우뚝
삼성전자가 ‘창조와 혁신’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세계 시장에서 남다른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시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직접 생산하고 판매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현지 국가와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함께 성장해 나간다는 게 삼성전자 글로벌 사업의 요체.
삼성전자는 세계 시장 곳곳에 생산·판매법인과 지점 등 총 100개 가까운 지역 거점을 갖추고 있으며 북미, 중남미, 유럽, 동남아, 서남아, 중국, CIS 및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 모두 8개의 해외 지역별 총괄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별로 차별화된 연구개발,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특히 삼성전자는 ‘상생 경영철학’을 해외에서도 그대로 실천, 세계 시민 기업의 면모를 가꾸기 위해 노력중이다. 덕분에 지난해에는 ‘포천’지가 선정한 전자업계의 ‘가장 존경받는 기업’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세계적인 브랜드 조사기관인 ‘인터브랜드’와 ‘비즈니스위크’지가 공동 발표하는 브랜드 가치는 올해 161억달러로 20위에 올라있다.
이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위상이 높아지게 된 것은 단지 ‘제품만 팔면 그만’ 식의 영업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스포츠·사회공헌·문화 등 다채로운 직간접 마케팅을 꾸준히 벌인 덕분이다. 또한 세계 주요 선진국의 교통 요충지에는 ‘관문’ 마케팅을, 세계적인 고적지에서는 ‘박물관’ 마케팅을 펼치고, 현지 문화에 어필하기 위해 ‘귀족’ 마케팅을 벌이는 등 참신하고 이색적인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실시하고 있다.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달라진 삼성의 이른바 ‘디자인 경영’도 삼성전자의 글로벌 전략에 중요한 축이다. 삼성전자는 미국·영국·일본·중국·이탈리아 등 5곳에 해외디자인연구소를 설립, 운영해 왔으며 디자인 가치창조에 전사적 역점을 두고 있다. 전세계 시장에서 1000만대 이상 판매된 휴대폰 ‘T100시리즈(일명 이건희폰)’와 블루블랙폰, 올 들어 LCD TV 시장을 석권한 ‘보르도 TV’ 모두 창조와 혁신을 디자인에 접목시킨 성공작들이다.
*윤종용 부회장 어록
우리나라 IT 산업의 거두이자 삼성전자 CEO인 윤종용 부회장은 ‘창조와 혁신’으로 기록될 경영철학을 담아 숱한 어록을 남겼다.
“가장 잘 나갈 때가 가장 위험하며 그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경영자는 내일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기업 경영은 혁신의 연속이며 혁신은 희생에 따르는 고통을 극복하는 인내력을 요구한다.”(윤 부회장 저서 ‘초일류로 가는 생각’에서)
“나는 혼란제조기(Chaos-maker)다. 나는 위기의식을 새로운 도약을 위한 동력으로 삼고자 노력했고 어느날 우리가 파산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늘 지니고 일했다.”(2003년 3월 파이낸셜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디지털 융합(컨버전스) 시대를 살아가려면 역사를 공부하십시오.”(2006년 12월1일 삼성전자 월례사)
“디지털 융합이 급속히 이뤄지는 대변혁기를 맞이해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창조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2010년 초일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발상의 전환을 통해 창조적 혁신제품을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차세대 산업을 주도할 미래 핵심기술을 먼저 확보해 표준을 주도하며 △브랜드·디자인·소프트웨어 등 소프트 경쟁력을 확보하고 △창의와 도전정신이 넘치는 조직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2006년 10월31일 삼성전자 37주년 창립기념사)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을 통해 창조하는 것이며, 이제는 군(대)도 혁신마인드 제고와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일류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일하는 방법의 혁신이 필요합니다. 꿈과 비전을 갖고 변화하고 혁신한다면 일류가 될 수 있습니다. 혁신의 과정은 매우 쓰지만 성공한 혁신의 열매는 답니다.”(2006년 6월27일 공군본부 특강)
“일류기업에서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가치관, 일하는 방법,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달성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의 도전은 목표와 방향을 우리 스스로 찾고 설정해야 하는 창조적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습니다.”(2005년 11월1일, 삼성전자 창립 36주년 기념사)
“21세기는 디지털 역동성을 가진 아시아가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미래는 예측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 가는 것이며 지금은 모두가 디지털 시대를 출발하는 동일 선상에 서 있기 때문에 빠르게 준비하고 창조하는 사람이 선두에 설 수 있습니다.”(2005년 5월17일, 포천 포럼)
서한기자@전자신문, h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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