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부처 내 고위직에는 아직도 행정고시 출신 인사들의 힘이 막강한 모양이다. 특히 이공계 출신이 고급 정책결정에 깊숙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됐던 산업자원부나 정보통신부에 4급 이상 기술직 공무원 비율이 15%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48개 중앙행정기관의 2005년 기준 기술직 고위 공무원 비율인 29.5%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타 부처에 모범이 돼야 할 산자부와 정통부가 오히려 이공계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동안 참여정부가 추진해온 이공계 우대정책의 허상이 드러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올 만하다. 산자부의 4급 이상 공무원 93명 가운데 기술고시 출신은 13명, 정통부도 50명 중에 기술서기관급 이상은 7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2003년 ‘4급 이상 기술직·이공계 임용확대 5개년 계획’에 따라 오는 2008년까지 정부 전체 4급 이상 공무원에서 기술직 출신 비율을 34.2%까지 끌어올리고, 5급 기술직 신규채용도 확대해 2008년까지 40%, 2013년까지는 전체 신규채용 인원의 절반 이상을 이공계 출신으로 충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이공계 고급 두뇌를 배치함으로써 공무원 사회를 질적으로 개선하고 정보화 시대에 정부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여보자는 취지다. 그리고 정부의 이 같은 의지로 지난 2003년 26%에 머물렀던 4급 이상 공무원 중 이공계·기술직 비중은 올해 30%를 넘어섰다. 특히 5급 채용에서는 이미 기술직이 행정직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애초 목표를 크게 앞당긴 셈이다.
그러나 산업정책을 주관하는 산자부나 정통부의 4급 이상 주요 보직에 행시 출신이 대거 차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는 외형상 목표는 달성했지만 내용 면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음을 보여준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4급 이상 주요 보직의 팀장이나 과장은 실질적으로 정책을 입안하는 공무원들이다. 실무 책임자이기 때문에 이들에 따라 정책 방향이 결정되고 추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대부분 행시 출신이라는 것은 이공계 출신의 채용확대로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자는 애초 취지와는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 이공계 출신 공무원은 늘고 있지만 연구개발이나 기술 관련 업무가 많은 특정 부처에서 근무하고 그나마도 주요 정책을 입안하는 자리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한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기에 이공계를 우대하려는 정부의 노력까지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이공계 공무원의 채용을 확대해 실질적인 변화를 몰고 오기 위해서는 주요 보직에 그들을 과감히 배치하는 용기가 뒤따라야 한다. 공무원 사회의 핵심세력인 행시 출신들의 강한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이 같은 어려움을 넘어서야만 기술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디지털시대에서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최고지도자부터 지방관리에 이르기까지 주요 보직을 이공계 출신이 장악하면서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중국과 베트남만이 귀감은 아니다. 안으로만 눈을 돌려도, 올 상반기 삼성·LG·현대 등 주요 그룹들은 물론이고 상장기업도 대졸 신입사원 중 80% 이상을 이공계 출신으로 선발했다. 수만 늘어난 게 아니다. 최고경영자의 자리도 이제는 이공계가 아니면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우리 기업들이 세계 일류기업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정부도 기업을 배워야 한다.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디지털사회의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기업이나 정부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산자부와 정통부가 이제부터라도 타 부처에 모범이 돼야 한다. 단순히 양적 증가에서 벗어나 정책을 결정하는 주요 보직에 과감히 이공계 출신을 발탁하는 게 두 부처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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