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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반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 끝에 1987년 5월 미시시피주립대 항공우주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88년 2월 우주개발을 막 시작하려고 로켓 전문가를 찾고 있던 천문우주과학연구소에서 정식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 해 가을에 필자를 포함해 4명의 연구원이 캘리포니아 주의 에어로제트 로켓회사에서 한 달간 액체 추진제 과학로켓에 대한 기술연수를 받았다.
연수가 끝나고 워싱턴의 국방성에 인사를 갔다가 뉴욕에 가는 도중 워싱턴 공항에서 연구원들의 가방 몇 개를 도난당했다. 분실된 필자의 가방 속에는 여권과 연수 때 받은 중요한 자료 등이 있었다. 뉴욕에 도착해 친지에게 가방이야기를 하니 재수 좋으면 돈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허탈한 마음에 혹시 자료라도 찾아보려고 친지와 함께 새벽에 뉴욕을 출발해 아침에 다시 워싱턴 공항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져보았다.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뉴욕으로 되돌아와 쓸쓸히 한국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이 연수를 통해서 액체 로켓의 개발에 한번 도전해 볼만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89년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소(KARI)가 설립되면서 필자는 우주추진기관그룹장으로서 로켓개발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KARI의 첫 번째 로켓개발 사업은 ‘한국과학관측로켓’이라는 뜻의 ‘KSR-I’ 이었다.
이 연구개발은 90년 7월부터 시작됐는데 막 개발을 막 시작한 가을에 정부에서 사업 필요성을 재점검하기 시작했다. 당시 연구소에서 로켓연구에 참여하고 있던 연구원은 15명 정도였다. 이 적은 인원으로 로켓을 개발하겠다고 하니 실패하거나 사고라도 나면 문제가 될 소지를 감안해 사업 초기에 정리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로켓개발 사업을 계속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당시는 연구소가 탄생한 지 3년 밖에 안 돼 매년 연구소 존립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때였다.
필자는 91년 첫 고체로켓을 제작해 지상연소실험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때 로켓 사업에 부정적인 정부 관료를 초청하자고 제안했다. 전혀 검증되지 않은 첫 번째 로켓 시험인데 잘못되면 사업뿐만 아니라 연구소까지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사업은 어차피 죽게 되어있는 것 같은데, 시험이 잘되면 혹시 우리 로켓팀의 신뢰가 높아져 사업이 살아날지도 모르니까 과감히 한번 도전해보자고 했다.
이렇게 큰 로켓 시험은 처음이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시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시험이 끝나고 악수하면서 보니 손바닥에 땀이 가득 나있었다. 정부에서 참석한 조정관은 숨이 막힐 정도로 열정적인 로켓 실험이 인상 깊었는지 내년에도 계속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며 성공적인 시험을 다시 축하해 줬다. 죽을 고비를 넘긴 ‘KSR-I’ 호는 1993년 9월 김 시중 과학기술부 장관의 축하 속에 50㎞의 고도까지 성공적으로 날아올랐다.
yschae@ka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