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재영 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장­(1)

(1)뉴욕지사에서 SKM지원

미국 보스턴 대학을 마치고, 1986년 SK뉴욕지사에서 근무하던 중 귀국 명령이 떨어졌다. SK상사 또는 경영기획실로의 부임이 당연시됐지만 필자는 당시 선경마그네틱(SKM) 생산공장을 선택했다. 불모지에 들어가 무언가를 일궈내고 싶었던 마음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당시 SKM은 성장기에 직면하면서도 체계가 미흡한 상태였기에 필자는 87년 3월 그룹 계열사에 입사한 즉시 공장으로 자원했고, 공장장에게 공장에서도 경영합리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시켜 ‘원가절감팀’이라는 부서를 새로 발족시켜 팀장을 맡게 되었다.

 부딪쳐서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됐던 젊은 나이였다. 하지만, 생각처럼 만만치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강성노조에 낙후한 환경에 어디 하나 희망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이 없었다.

 SKM공장에 첫 출근하는 날부터 예상치 못했던 일을 겪기 시작했다. SK 뉴욕지사에서 왔고 낙하산이라는 루머로 인해 사무실도 화장실에 근접한 곳에 마련되어 있었고 직원들은 필자와의 정보공유나 대화를 꺼리기까지 하는 눈치였다. 당시 공장에는 사무직 내에서도 학력차이에 대한 갈등이 심했고 나의 해외 업무경험은 그들이 보는 필자에게 오히려 설상가상으로 작용한 셈이다. 첩첩산중에 있는 막막한 심정이었다.

 업무도 시급한 문제였지만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려면 팀원들과의 벽을 먼저 허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 길일수록 돌아서 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공장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려고 그들의 방식대로 거리를 좁혀 나가기 위해 노력을 했다. 체면치레 같은 것은 떠났던 것 같다. 얼마 후 다가가지 않아도 스스럼없이 필자를 찾아와 이견 조율을 요청하는 단계까지 분위기가 조성돼, 표현할 수 없는 가슴 찡한 보람을 느꼈다.

 본격적으로 팀워크를 이뤄 생산성 향상, 산업공학 측면에서의 원가절감 등을 연구와 사례조사 등을 통해 공장에 접목시키는 업무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시험에 든 것처럼 고비는 첩첩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도국으로서 산업발달에 끊임없는 진통을 겪고 있던 우리나라는 87년 전국에 노조의 붐이 일었고 SKM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장에 노조가 생기면서 노조관리 업무까지 맡게 되었다. 가족 같은 그들을 관리하는 입장이 된 심리적인 부담은 아랑곳하지 않듯 시시각각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 되었다.

 88년 노사분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당시 회사 측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으며, 노조에서는 분신까지 준비하는 등 사태가 심각했다.

 노조관리 업무를 맡고 있던 필자는 최후 타결전선에 투입되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얼마 전까지 술잔을 부딪치며 생사고락을 얘기했던 그들의 얼굴은 살기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순간 처음 들어와서 몇 개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같은 이들과 또 한번의 위기관계로 내몰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이 위기가 될지 기회가 될지 하늘만이 알고 있었다.

 필자는 처음 시도했었던 마음으로 상황을 풀어나가기로 결심했다. 타결시점에서 충혈된 눈으로 온갖 불만을 토로하던 그들이 시간이 가면서 절충안을 제시할 수 있는 틈을 비춰 주었다.

 이로써 그간 생산성 향상과 원가절감 등으로 공장 내부의 분석을 통해 회사 측과 노조 측의 분쟁을 중재하면서 상호 윈윈(win-win)을 이끌어냈고, 그 공로를 회사 측으로부터 인정받음과 동시에 노조위원장으로부터 감사패까지 받았다. 이 때의 길고도 험난했던 경험은 다시 할 수 없는 값진 기억으로 훗날 사업경영을 해나가는 과정에 중요한 지침서 중 하나가 되었다.

  jylee@dnedne.com

 ※부제:팀원간 갈등해소에서 노조협상 극적타결까지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