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학계의 거목, 산증인,개척자, 행운아.’
우리 나라에 처음 인공지능(AI) 연구의 씨앗을 뿌리고 가꿔온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공지능패턴인식연구실의 김진형 교수(57)를 이르는 말이다. 김 교수가 미국 UCLA에서 전산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 휴즈 리서치 센터 등을 거쳐 지난 85년 유치과학자로 귀국해 인공지능, 더 정확히는 패턴인식 연구의 초석을 놓은 지 벌써 20년이 됐다.
“엊그제 같은데, 힘들고 괴롭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20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과학기술의 환경이 삭막했던 우리나라에 ‘인공지능’의 꽃을 활짝 피워야겠다는 각오 하나로 버티며 여기까지 달려온 것 같습니다.” 김 교수의 회고담이다.
연구실 개소 20주년을 맞아 제자들이 김 교수의 그동안의 열정과 노고에 대해 감사하는 뜻으로 오는 22일 조촐한 기념식을 갖는다.
◇초기 정보수집 전화비만 500만 원=김 교수의 인공지능 연구에 대한 열정은 초기 인터넷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던 시절 미국의 관련 자료를 국내에 들여오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85년 만해도 미국과의 학술정보교류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보를 얻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전화를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한 달 전화요금이 월급보다 2배나 많은 500만 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인터넷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정보교류에 애를 태워야만 했던 김 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김 교수가 유치 과학자로 발령받은 KAIST에서 처음 산 장비는 심볼링 머신이다. 고도의 의사결정을 하거나 병을 진단하는 전문가 시스템 연구를 위해 도입했다. 그나마 예산이 부족했던 김 교수는 미국 IT업체인 TI사를 설득해 고속 정보처리 기본툴인 ‘리스프(LISP)머신’을 기증받았다.
김 교수는 “지금이야 PC가 다운되면 인터넷을 통해 고장 난 PC를 떡 주무르듯 하지만 당시엔 전화로 이루어졌다”며 “과학기술부와 삼보컴퓨터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PC고장을 자동 진단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지금 나온 시스템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PC가격이 1000만 원대였으니, PC가 귀하던 시절 이 시스템의 역할은 애지중지하던 PC만큼이나 중했다.
◇국내 패턴인식의 산증인=연구실이 자리를 잡아가며 김 교수의 인력 양성 사업과 연구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지금은 보편화되어 있으나 90년대 초반에는 획기적이랄 수 있는 스캐너로 읽어드린 글을 문자로 인식하는 ‘실눈’이란 시스템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이후 이 제품은 김 교수 제자에 의해 ‘아르미’라는 이름으로 재탄생, 시장에 등장했다.
이어 94년에는 삼성·현대·대우를 비롯한 6개 기업이 참여해 디오텍이 만들고 있는 개인휴대단말기(PDA)에 한글 문자인식기술을 구현한다.
2000년에 이르러 김 교수는 제자가 차린 인지소프트에 기술을 이전해 전표나 수표 인식, 휴대폰 카메라를 이용한 명암인식 등의 제품을 쏟아내며 중견기업으로 우뚝서도록 하는데 주춧돌이 됐다. 이 회사 창업초기에는 연구실 연구원만 7∼8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최근 김 교수는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각국의 간판을 실시간 우리 말로 번역해주는 요소기술 연구를 인지소프트와 진행하고 있다.
◇제자들, 산·학·연 리더로 활약=김 교수가 배출한 인력들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나 대학 등에도 골고루 포진해 있지만 유난히 기업 대표들이 많다. KT영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영환 박사와 고려대 이성환 교수, 가온아이의 조창제 대표, 크로스아이텍의 이현규 박사, 핸디소프트의 안경영 사장 등이 모두 김 교수의 제자들이다.
김 교수는 “실험실 선·후배 간 돈독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며 “지금도 신년하례회나 사은회, 가을 홈커밍데이, 각종 졸업논문 발표회 때가 되면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대부분이 자리를 같이 한다”고 자랑했다.
김 교수는 지난 20년간 박사 30여 명, 석사는 66명을 배출했다. 또 박사후 과정으로 배출한 9명 가운데 중국 과학원 교수가 된 C.N.류 박사 등 3명은 외국인 출신으로 베트남, 중국 등 각국 과학기술의 핵심두뇌로 활동하고 있다.
김 교수는 현재도 한국정보과학회장과 대덕IT포럼 회장을 맡고 있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겨울의 삭풍을 모두 이겨내야만 피어나는 매화의 자태에 이웃 아저씨같은 푸근함을 겸비한 김 교수의 얼굴 주름에서 한국과학기술의 희망을 본다.
대전=박희범기자@전자신문, hb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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