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태
거인 인텔이 변하고 있다. 중앙처리장치(CPU)로 PC산업을 좌지우지하던 인텔이 새롭게 등장하는 컨버전스 시대에 맞춰 탈피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인텔은 그동안 CPU 분야에서 80%대의 막강한 점유율을 보이며 수십년간 기술과 시장을 만들어왔다. 인텔은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끊없이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CPU로 구현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텔의 전략이 수정됐다. 기술을 위한 기술 개발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칩을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휴대기기와 디지털 가전 시대가 찾아오면서 과거처럼 PC라는 분야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텔이 추구해 온 전략이 ‘기술 지향적’이었다면 최근 들어서는 ‘소비자 친화적’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CPU의 클록 속도를 높이고 집적도를 높여 대중에게 ‘기술력’이라는 권력을 휘둘렀지만, 이제는 자기네 기술을 강요하기보다는 소비자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기술을 바꿔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2005년 추계 인텔개발자포럼(IDF)에서의 화두도 역시 소비자였다. 사용하기 쉬운, 팔릴 만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을 인텔 주요 간부들이 기조연설 때마다 강조했다.
자금력과 기술력을 갖춘 인텔이 시장과 소비자를 경영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는 데 비해, 최근 부상하는 국내 시스템반도체 벤처 업체는 아직도 대부분 그들이 생각하는 ‘기술’에 너무 경도돼 있다. ‘이렇게 훌륭한 기술로 칩을 만들었는데, 왜 안 사가냐’는 엔지니어들의 푸념이 대표적인 사례다.
팔리는 물건을 만들겠다는 세계적인 기업 인텔과, 좋은 물건인데 안 팔린다는 국내 팹리스 업체들의 푸념이 대조적이다. 인텔의 전략 변화를 보면서 ‘좋은 물건이 잘 팔리는 게 아니라 잘 팔리는 물건이 좋은 것이다’라는 말이 진부하게 들리지 않는다. 국내 반도체 벤처들도 기술이라는 자기만의 방에 갇혀 헤매지 말고 시장이 원하는 것,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염두에 뒀으면 하는 바람이다.
샌프란시스코(미국)=김규태기자@전자신문, s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