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1만4500명

글로벌 IT기업의 대명사, IBM과 HP가 구조조정이란 칼을 빼들었다. 적자생존의 논리가 횡행하는 IT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특단의 조치다. 먼저 구조조정의 포문을 연 곳은 IBM. 경쟁력이 떨어지는 유럽 지사를 중심으로 1만4500명에 달하는 인력을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IBM 전체 인력의 5%에 이르는 규모다.

 IBM은 90년대 이후 성장엔진인 글로벌 서비스 사업부문에 승부수를 던지겠다는 전략이다. 하드웨어 업체에서 서비스 업체로 진화하고 기업으로서 영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글로벌 서비스 부문에 집중하는 게 현명하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다. 인력 감축을 통해 절감한 비용은 글로벌 서비스 부문의 경쟁력 제고에 주로 투입할 예정이다. 글로벌 서비스 부문의 경영구조도 바꿨다. IBM 차기 대권주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던 글로벌 서비스 부문 책임자 존 조이스가 다른 회사로 옮기면서 생긴 공석을 마이크 다니엘스 등 3인의 임원이 분담하는 과두체제로 전환했다. PC부문을 중국의 레노버에 매각한 마당에 아웃소싱, 컨설팅 등 서비스 부문 경쟁력마저 확보하지 못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배어 있다. ‘빅 블루(IBM의 별칭)’의 사활을 글로벌 서비스의 성패에 위탁하고 있는 셈이다.

 HP도 다급한 처지다. 컴팩 인수 후 델과 IBM의 틈바구니에서 발버둥쳤지만 실적은 부진을 면치 못했고 주가는 반토막이 났다. 월가의 분석가들은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PC와 프린터 사업 부문의 분사를 제안했지만 HP의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이런 상황에서 칼리 피오리나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마크 허드 CEO가 과연 돌파구를 마련할지가 업계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HP의 행보에 따라 IT업계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허드는 장고 끝에 비책(?)을 내놓았다. 우선 전체 인력의 10%인 1만4500명의 인력을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정리하겠다는 수가 IBM과 똑같다. 설마 사람 정리하는데 팔미사노와 허드가 교감을 했을 리는 없지만 우연의 일치 치고는 심술궂다.

 HP는 이번에 인력 감원과 함께 장기 근속자의 퇴직 유도, 연금 지급액 축소 등의 조치도 내놓았다. 조직도 일부 수술했다. 기업들과 공공부문에 대한 판매를 전담해 온 고객솔루션그룹(CSG)을 해체하는 대신 여기서 일하던 영업 및 지원 인력을 다른 3개 조직에 전진 배치했다. 가급적 영업 인력은 정리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숙적 관계인 IBM과 HP의 구조조정은 대강 이렇게 결론이 났다. 결국 두 회사가 이번 구조조정 계획을 얼마나 강단 있게 밀어붙여 조직을 가볍게 하고 핵심 전략 부문에 집중할 것이냐에 따라 향후 회사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전체 글로벌 IT업계의 정치 지형이 바뀌는 중대한 사안인만큼 모두 숨죽이고 양사의 구조조정 과정을 관찰할 것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 중 하나가 구조조정의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야 하는 1만4500명의 IT인력이다. 두 회사의 감원 인력을 합치면 무려 3만명이다.

 빌 게이츠는 최근 한 행사에서 “미국에 능력 있는 컴퓨터 전공자들이 부족하다”며 정부와 업계의 관심을 촉구했다. 능력 있는 컴퓨터공학 전문가를 고용하려 해도 미국에선 찾기 쉽지 않다는 넋두리다. 빌 게이츠뿐만이 아니다. 최근 미국 내 여러 IT업계 지도자가 외국의 전문 인력 수입이 지금보다 용이해져야 한다고 서슴없이 얘기한다. 9·11테러 이후 외국 전문 인력에 대한 비자 발급이 엄격해지면서 외국계 연구인력의 미국 이탈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쪽에선 비용 절감을 위해 인원을 정리하겠다고 난리고 다른 한쪽에선 IT전문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아이러니다.

◆장길수 국제기획부 부장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