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지난 97년 열림기술을 통해 선보인 골도 전화기의 전국 노인정 보급계획과 관련, 예산집행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ETRI는 연구기관이므로 예산에 사회 무료 봉사라는 항목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기관장이 나서서 10억원이 넘는 예산을 집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괜히 예산을 집행해 놓고 감사에 걸려 곤욕을 치르느니 차라리 상급기관에 기획안을 떼밀어 놓고 눈치를 살피는 게 하급기관으로서는 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고(?)를 치고 일을 만들려 하는 기관장 입장에서는 이 같은 구속이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골도 전화기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인기가 더 많습니다. 최근 ETRI를 방문한 알제리나 파라과이의 VIP만 해도 추가 주문을 하거나 본국 방송에 나가 골도 전화기 자랑을 할 만큼 한국의 기술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마케팅을 겸한 국내 무료 보급에 의미를 둘 수 있을 텐데 정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감사로 경을 쳐 다시는 아무 일도 안 할 것 같던 ETRI 관계자의 말이다. 이 같은 사정은 다른 출연연도 마찬가지다.
“뭔가 일을 기획하다가도 정부부처 감사가 무서워 포기하기 일쑤입니다. 케케묵은 엄격한 규정을 들이대면 기관장이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대덕연구단지에서 그래도 이름깨나 있는 모 정부출연연구기관 기관장이 ETRI를 동정하며 내뱉는 하소연이다. 이 기관장의 말에 따르면 출연연의 자율권이 정부의 감사와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해당 부처 감사 담당자에게 물어 봐야 하고, 그나마 안 된다는 답변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일을 하기도 전에 사기가 꺾이고 나면 다음 번 기획안은 보나 마나다.
정부는 최근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각종 규제를 풀고 있다. 기업만이 아니라 출연연에 얽히고설켜 있는 규제를 풀면서 정부와 기관이 서로 신뢰하고 사업을 인정할 묘수는 없을까.
경제과학부·박희범기자@전자신문, hb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