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편리한 세상의 조건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비밀번호 하나씩 갖고 살아가고 있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 은행업무를 보기 위해, 휴대전화 음성메시지를 듣기 위해 비밀번호가 필요해진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기억해야 할 비밀번호가 하나 둘이 아니다. 비밀번호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켜야 할 게 많다는 뜻이다. 사이버 세상에서는 실명 대신 아이디(ID)와 비밀번호가 통용되고 있다. 어떤 인터넷 사이트든지 가입하려면 개인정보뿐만 아니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한다. 다시 접속할 땐 흡사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의 ‘열려라 참깨!’처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한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면 접속도 힘들다. 만약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유출되면 사이버 세상에선 다른 사람이 내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이버 세상의 금융서비스 채널인 인터넷 뱅킹도 다를 게 없다. 다만 금융거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보안과 안전성이 부가될 뿐이다. 그래서 아이디, 비밀번호에다 이중 삼중의 보안장치로 공인인증서, 보안카드번호까지 사용한다. 때문에 한 번 사용하려면 비밀번호만 네 번 정도 입력해야 할 만큼 복잡하다. 기억력을 동원하고 은행에서 제공한 보안카드까지 뒤척거려야 한다. 여기에 은행의 방화벽 등 각종 보안장치를 통과해야만 이용이 가능하다. 은행이 ‘인터넷 뱅킹은 전문 해커도 좀처럼 해킹하기 힘든 철벽’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이런 인터넷 뱅킹을 해킹해 거액의 예금을 빼돌린 사건이 일어나 금융계에 비상이 걸렸다. 그것도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키보드 해킹’ 프로그램과 온라인 게임에 능숙한 정도의 컴퓨터 지식을 갖춘 아마추어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아마추어 해커의 돌팔매질에 그렇게 자랑하던 4중의 보안장치가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행의 보안 프로그램에도 문제가 있고, 피해 고객 역시 보안 노력을 소홀히 한 것도 사실이다. ‘보안 불감증’이 부른 인재다. 하지만 연 인원 2257만명이 사용할 정도로 일반화된 금융 서비스 채널에서 ‘도둑’을 맞은 것은 인터넷 뱅킹 이용자의 불안과 불신을 야기하기에 충분하다. 그 파장이 엄청나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기는 이유는 개인금고보다 더 믿을 만해서다. 수익성이나 편리성도 안전성을 압도할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위험 요인이 있는 금융기관에는 돈을 맡기지 않는 것처럼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 인터넷 뱅킹이라면 이용자는 떠난다. 인터넷 뱅킹이 못 미더워 모든 거래가 창구나 ATM에서 다시 이뤄지게 된다면 은행이든 소비자든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지금은 온라인 거래, 사이버 거래 시대다. 인터넷이나 휴대폰을 통해 금융 거래를 하고 주식을 매매하는 시대다. 보안과 안전성을 바탕에 깔고 한두 개의 비밀번호로 거래를 하는 신용사회다. ‘따뜻하고 편리한 세상’을 만드는 IT가 한편으로 신용사회를 무너뜨리는 역작용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인터넷으로 금융 거래를 하거나 물건을 살 때 신용카드나 주민등록번호, 비밀번호를 입력하더라도 그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 내가 키보드로 치는 이런 정보가 그대로 새나가고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개인 신용정보를 보호하지 못하면 ‘따뜻하고 편리한 세상’도 공염불이다. 우리는 유비쿼터스 사회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새로운 IT 서비스를 늘리고 편리성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용정보의 안전이다. ‘정보문화의 달’ 6월의 한가운데 자리한 ‘정보보호 주간’의 의미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윤원창 수석논설위원 wcyoo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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