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최충엽 신지소프트 사장 (1)

(1)프로그래머에서 경영자로의 변신

93년 11월, 나는 포항공대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한국무역협회 자회사인 KTNET(한국무역정보통신) 연구소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프로그래머로 근무하면서 쇼핑몰 개발, 웹팩스 서비스 개발, 통상산업부(현 산자부) 홈페이지 개발 등 다양한 업무를 진행했다.

프로그래머로서 하루하루 일에 몰두하며 보내던 중 회사에 새로운 CEO가 부임했다. 당시 새로 부임한 CEO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회사의 ‘10년지 대계 전략’을 세우고자 앤더슨 컨설팅사에 외주를 주었다. 그리고 회사 내부에서 앤더슨 컨설팅사를 주도하며 프로젝트를 수행할 담당자를 찾게 됐다. CEO는 프로젝트 담당자로써 사내 직급자를 물색했으나, 마땅한 인재가 없어 고심하던 중 당시 대리로 근무하던 나를 앤더슨 컨설팅사의 파트너 적임자로 발탁했다.

팀원의 위치에서 팀장의 역할을 맡게 된 나는 늘 기업가 정신에 입각해 일을 추진하곤 했다. 회사가 커나갈 수 있는 성장의 원천은 바로 기업가적 마인드에서 나온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나는 10년지 대계 프로젝트 중 가장 먼저 인터넷 포털 구축을 추진했다. 인터넷이란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기에 나는 앤더슨 컨설팅사에 인터넷의 중요성과 KTNET이 인터넷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매우 절실함을 역설했고, 그 결과 현재 국내 최대 무역사이트로 자리잡은 EC플라자(www.ecplaza.co.kr) 등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나를 상무가 고민해야 할 부분을 대리가 고민한다고 해 일명 최 상무라고 불렀다. 또 KTNET 사규에 대리가 팀장이 될 수 없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KTNET CEO가 직접 임원실 방을 만들어 나에게 제공함으로써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까지 만들어 준 사건은 한동안 사내에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97년 7월 KTNET의 미래개발팀장으로 근무하던 나는 많은 벤처기업을 만나면서 다양한 간접 경험을 쌓게 됐다. 이에 성장 가능성이 높고, 자기 분야에서 재량권을 갖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벤처기업을 직접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결국 고심끝에 내 능력을 높이 평가해줬던 KTNET을 과감히 퇴사하고, MINET이라는 벤처기업에 몸담게 됐다.

하지만 당시 IMF라는 경제여건은 벤처기업들의 자생력을 송두리째 뽑아 버렸고, 내가 몸담았던 MINET 역시 한파를 비껴가진 못했다. 98년 9월 결국 회사는 문을 닫았고, 나는 실업수당을 받는 처지에 놓여졌다. 내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좌절감과 시련을 맛 본 시기였다.

벤처의 쓴맛 단맛을 다 겪으면서 나는 내 자신을 더욱 독하게 다스렸다. 이후 나는 외국계 기업 GE 계열사인 GE인포메이션 서비스에서 메디슨, 비트컴퓨터 등의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며, 글로벌 감각을 키우고 사고의 폭을 넓히는데 매진했다.

1999년 초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구상하던 중 휴대폰의 빠른 진화속도를 예의주시하게 됐다. 휴대폰에서 전혀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비즈니스가 열릴 것이라고 예측한 나는 모바일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신념을 굳히게 된다.

곧바로 우수한 인재들을 발굴해 새로운 모바일 비즈니스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고석훈 CTO가 지금의 신지소프트를 설립할 수 있는 모태를 만들었다. 신지소프트가 설립된 지 1년 후인 2001년 2월 나는 당시 이상춘 상무와 뜻을 같이 하고 신지소프트에 합류해 신천지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choicy@sinjisof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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