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 한국 지사장 자리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무조건 따르는 것도, 무조건 한국식을 고집하는 것도 방법은 아니다. 결국 지사장 스스로 그 상황에 맞게 풀어야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지난 1998년 EMC 본사 정신력 강화 프로그램(Fire walk) 중 필자가 숯불 위를 걷고 있다.
정형문 에이템포 亞총괄 사장 (4) 외국기업 지사장의 고단함
한국EMC는 1995년 7월 10일에 설립됐다. 초대 사장이자 첫 직원인 ‘원맨 오피스’로 일을 시작한 후, 당해 년은 물론이고 96년과 97년 연속 본사의 예상을 뒤엎는 놀라운 매출을 기록했다. 당시 분위기는 분기 말, 영업사원들이 주문서를 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전화를 피하는 현상까지 발생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성장은 어려운 고난의 시간들을 이겨낸 결과다.
1997년 말 이른바 IMF 외환위기 시대라 부르는 경제 위기가 아시아 지역을 휩쓴 때다. 온 국민이 ‘아나바다’나 외채청산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에 한창이었다. 국가경제 및 국제신인도 회복을 위한 노력은 깊어갔지만 추락한 국가신용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당시 외국 기업들은 한국 지사를 통해 겉으로는 마치 한국을 돕는 것처럼 그럴듯한 마케팅 정책을 발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실채권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통제에 나선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당시 발표됐던 외투법인들의 정책을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국내 수입업체들이 담보를 제공하고, 신용거래를 하는 주거래 은행도 자기네들이 믿을만한 큰 은행을 이용하지 않으면 신용장(L/C) 거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식이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조차 거래 은행 때문에 제품을 살 수 없는 처지에 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속 다르고 겉 다른 정책에 속만 태우고 있을 수 가 없었다. 1998년 개량한복을 입고 미국 본사를 찾아 갔다. 만나는 임원들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한국식 턱시도”라고 말하면서(본사를 방문하게 된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면서) 당시 CEO와 독대를 요청했다.
내가 제시한 현실적이고 납득할만한 대안은 ‘무기한 신용 거래’를 허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대답은 “노(No)”였다. 이틀 간 체류하면서 이어진 협상. 나는 “최대 X천만 불까지, 한정된 고객에게만”이라는 조건으로 동의를 받아냈다.
당시 내 주장은 이랬다. “한국의 은행은 절대 파산하진 않는다. 삼성, SK, 한전, 포항제철 같은 회사가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 현재 우리가 처한 환경이 그럴 뿐이지 우리는 반드시 일어선다. 아나바다가 뭔지 아느냐?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가 아니냐? 비록 지금은 자금난을 겪고 있지만 한국 경제의 인프라가 되는 기업들에게 지금 우리가 도움을 주면, 언젠가 그들도 우리의 도움에 보답할 것이다. 한국인의 정을 너희는 이해 못한다.”
귀국 후 이 원칙을 최대한 활용해 협력업체의 손실을 줄여주었다. 실수요자에겐 다소나마 대금 지급과 관련해 숨통을 터줄 수 있는 전략을 펼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IMF 외환위기 기간 동안 우리의 성장은 본사도, 국내 경쟁사들도 놀라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그해 매출이 전년보다 더 많았을 뿐 아니라 이듬 해 IMF 외환 위기를 거의 극복하게 된 후 고객들과 협력사들도 우리의 도움을 잊지 않고 보답해줬다. 매년 100% 이상씩 매출을 신장시킬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사건’이 배경이 됐다.
후일 개량 한복을 입고 어쩌고 하는 기사들이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되고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기행’ 또는 ‘깜찍한 아이디어’식으로 이슈화한 보도 내용이 다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한복은 그렇게 진정한 결단이 요구될 때 그 위대한 힘을 보여주었다.
외국투자법인의 한국 책임자라는 자리는 쉬운 자리가 아니다. 미국식 말로 ‘개와 나무 사이에 끼어(between a dog and a tree ) 물러날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조건 한국식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고 무조건 본사의 지침을 따르기만 할 수도 없다.
본사에는 한국을 대표하고 국내에는 외국 회사를 대표해야 하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져야 하고, 그나마 두 얼굴이 일관성을 갖고 있어야만 상생의 묘를 찾아낼 수 있는 험한 자리다. 비즈니스의 원천인 사람과 직원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하고, 국내 산업발전에도 기여하면서 본사로부터도 신임을 받을 수 있는 리더십은 자기가 처한 현실을 그 누구보다 보다 넓게, 깊게, 자세히, 긍정적으로 분석한 후 실행에 옮기면 누구나 갖출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hayward.jeong@atempo.com
사진: 옳은 것을 밀어부치는 것은 성공의 한축이기도 하다. 지사 설립 초기인 1996년 11월, 국내에서 개최한 신제품 발표회 당시 본사 임원과 함께 한 정형문 사장(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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