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EMC와의 인연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도 있다지만 그것은 그 고생이 지난 이후의 회고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맞는 말이다. 다소 고생스런 유년의 생활과 그런 삶 속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은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큰 줄기일 수밖에 없다.
1957년 7월 16일 오전, 6·25전쟁 때 학도의용군으로 입대한 아버지가 육군 대위로 계실 때 아이가 곧 태어날 것 같다는 전령의 말을 듣고 부랴부랴 귀가, 마루에 걸터앉아 군화 끈을 푸는 사이. 방에서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또 아들이네!” 하는 산파의 환호성이 울려 퍼진 순간, 그 아버지는 다시 끈을 매고 부대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렇게 6남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의 유년 시절은 고달팠다. 아버님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1년 전, 5·16 때 출병을 거부한 부대 소속 장교였기 때문에 강제 예편을 당하셔야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봄 소풍 때는 소풍의 별미인 삶은 계란은 커녕 밥도 없이 찐 고구마를 싸가지고 집을 나서야 했다. 안 가지고 간다고 강짜를 부리고 울며불던 그 때. 나이 들어서 다시 생각해볼수록, 껍질을 예쁘게 벗긴 고구마를 귀하디 귀한 창호지로 꼭꼭 싸고 계시던 아버님의 뒷모습이 자꾸만 선명해진다. 그 살림에 6남매를 키우셨을 부모님의 고단함을 그땐 미처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중1 때 두살 터울의 작은 형에게 “형편상 자식 셋을 모두 도시로 보낼 수 없으니, 너보다 더 공부 잘하는 동생을 광주로 보내게 너는 영광고등학교로 가라”고 말씀 하셔야했던 아버지. 서러움에 울어대던 그 때의 작은 형에겐 지금도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고생스런 삶은 청년이 되던 시절까지도 이어졌다. 대학 진학 후 군대 생활을 하는 도중 10·26 사태가 일어나고, 후속 조치로 감행된 사회정화의 일원으로 당시 농협조합장이셨던 아버님은 또 다시 일자리를 잃으셨다.
대학에 복학한 후, 아르바이트와 학교장학금 그리고 농협융자금을 통해 겨우 대학을 마치고,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한 곳이 동아컴퓨터다. 동아컴퓨터는 당시 지사가 없었던 NCR의 한국 총대리점이었다.
전국에서 전산학과를 개설해 졸업생을 배출하는 학교가 3곳 밖에 되지 않던 시절이라, 어느 컴퓨터 회사나 시스템엔지니어(SE)는 전공불문하고 적성검사와 필기고사, 면접을 통해 뽑던 때였다. 입사 동기 11명 중 이공계가 아닌 사람으로는 내가 유일했지만, 그래도 당당히 2등으로 합격했다.
몇 년 후 어처구니 없는 프로그램 버그 때문에 꼬박 3박 4일을 고생한 후, 과감히 인생변환을 꿈꾸며 영업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감히 90년대 중반 이후 ‘스토리지 전도사’랍시고 떠들고 다니던 시절부터 ‘스토리지 업계의 대부’라는 칭호까지 듣게 될 때까지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열정을 가지고 일해온 기업 EMC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한 번 흘러가버린 물은 물레방아를 다시 되돌리지 못한다”는 린든의 말처럼, 나에겐 이제 모두가 다 과거사일 뿐이지만, 질곡의 밑바닥을 헤매던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태어남이 내 뜻이 아니었고,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 지 모르는 세상. 매사 내 뜻대로 되지않는 게 순리 아닌가? 그러니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내 뜻대로 된 것이 있다면 적어도 나는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닌가….”
그 바닥에서 훌훌 일어섰던 어느 겨울의 작심은 내가 힘들고 지쳤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워 주는 가장 큰 힘이 됐다.
hayward.jeong@ate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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