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2005-다국적기업]희망 머금은 햇살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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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김없이 해가 바뀌었다. 연초 주식시장이 활황을 보이면서 크게 오르면서 지난해 어두웠던 분위기가 다소 밝아졌다.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주가는 경기선행지수로 활용된다. 경기 상황이 크게 호전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만은 지난해와 확연히 달라졌다. 최소한 “최악은 지났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다국적기업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최근 2∼3년간 국내 경기가 침체되면서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수익은 고사하고 매출 내기도 힘들었다. 저가경쟁으로 망신창이가 된 업체들이 적지 않았다. 그야말로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여기에 본사 차원의 인수합병(M&A)까지 잇따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불황은 그렇게 다국적기업들을 코너로 몰아넣었다.

 이런 사이 중국과 인도는 초고속 경제성장과 거대 인구를 앞세워 아시아 최대 시장으로 떠올랐다. 일본 시장의 분위기도 되살아나고 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위상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일호 한국오라클 사장은 “과거 한국 지사는 성장성과 규모면에서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했지만, 최근에는 그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며 “경기불황탓도 있지만 중국 등 거대 신흥시장의 출현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분석했다.

 이 여파로 한국지사는 일정부분 구조조정을 감내해야 했다. 경기침체로 매출이 떨어진데다 시장 규모마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과거에 비해 본사의 정책적 배려가 줄어들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그렇다고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형 이동통신과 부품업체들은 한국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 로컬화를 넘어 토착화를 시도했다. 또 사회공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업들도 많았다. 대기업의 수요가 줄자 중소기업 시장에서 돌파구를 마련한 기업들도 적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성과를 낸 기업들은 올해를 힘차게 맞게 됐다. 시장은 바닥을 찍고 수요가 살아나고 있고, 정부도 전산투자 예산의 상당부분을 상반기에 집행할 예정이다. 민간과 공공 수요가 함께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전산투자를 줄였던 대기업들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산예산을 새롭게 편성하고, 정보화에 뒤쳐진 중소기업들도 IT 투자에 눈을 떠가고 있다. 상황이 호전되고 있는 시그널이 여러곳에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기업간의 경쟁도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지난해 상당수 다국적기업들이 본사 차원의 M&A를 진행한데다, 올해도 기업간 ‘짝짓기’가 최대의 화두다. 지사 차원에서는 경쟁자가 줄어 들고 시장 기회가 커진셈이니 손해볼게 없다. M&A에 따른 구조조정은 불가피하겠지만, 향후 성장성 측면을 고려하면 본사나 지사 모두에게 기회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 기업들의 한국 진출도 잇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기업들이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유럽과 미국은 물론 한국 기업들도 인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나 가전업체인 하이얼이 국내에 진출, 관련업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것처럼, 올해도 중국 기업들의 한국 진출은 다국적기업들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다국적기업들의 질적인 변화도 예상된다. 매출보다는 수익에 포커스를 맞출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성숙 시장이어서 과거처럼 “공격 앞으로”만을 외치기는 힘들게 됐다. 컴퓨팅기업들이 유지보수비용을 현실화하는 등 지난해부터 이같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한국 고객들은 다국적기업들로부터 공짜나 덤을 기대하기 힘들어지게 됐다. 하지만 한국이 ‘테스트마켓’으로 여전히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 ‘안테나’ 상품들이 국내에 쏟아낼 공산은 크다.

 국내 로컬기업들과의 협력도 크게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동통신, 반도체, 게임 등의 분야에서 이미 한국 기업들은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고, 전자태그(RFID) 등 신기술에도 앞서가고 있다. 과거처럼 한국 기업은 뒤쳐지고, 다국적기업은 앞서갈 것이라는 등식은 이제 성립하지 않는다. 지난해 삼성전자와 소니의 기술제휴가 대표적인 사례다. 다국적기업은 국내 시장뿐만아니라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서도 국내 업체들의 필요하게 됐다.

 한국내 연구센터(R&D) 설립도 초미의 관심사다. 정부 차원에서 해외기업들의 국내 R&D센터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다국적기업들도 한국내 R&D 센터 설립을 다각적으로 검토중이다. 지난해 인텔, IBM, 프라운호퍼, 지멘스, HP 등이 국내에 R&D 센터를 설립했다. 올해는 더많은 다국적기업들이 국내에 R&D센터를 설립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부의 시각이다. 정부가 외국기업들의 투자유치 조건들을 완화하고, R&D 센터 설립시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다. 다국적기업들이 한국을 전략적 거점으로 기업의 미래 비전을 설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양극화 현상도 심화될 전망이다. IT가 1등만 살아남는 방향으로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컨버전스(융합) 바람까지 더해져 고유영역마저 파괴되고 있다. 시장을 지배하는 업체와 그렇지 못한 업체들간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고객들의 성향도 원벤더 전략으로 바뀌고 있다. 2등이 설 자리가 그만큼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전사자원관리(ERP) 시장에서 SAP코리아의 약진은 이같은 현상을 잘 설명해 준다. SAP는 세계 1위 ERP업체다.

다국적기업들은 어느해보다 바쁜 한 해를 보내게 됐다.

김익종기자@전자신문, ij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