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자산업에 몸 담은 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날이 하나 생겼다.
10월10일. 일본삼성(사무슨:サムスン)이 도쿄 록폰기에다 지상 27층짜리 본사 사옥을 마련한 날이다. “아무리 삼성이 대단키로서니 사옥 마련 정도로 ‘반드시’ 운운은 지나치다”는 지적을 받을 법도 하다. 그러나 일본삼성 옆 건물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면 고개가 끄떡여질 터다. 바로 일본IBM 본사다. IBM은 1971년 일본 컴퓨터시장의 자본 자유화가 결정되자마자 록폰기에 사옥을 마련했다. 미국 IT의 일본 열도 공략을 위한 첫 씨앗을 뿌린 것. 우리는 이날 미국보다 32년 늦게 일본 열도에 진출한 셈이다.
일본에 ‘사무슨’ 선풍이 일고 있다. 칼럼니스트인 니시오카씨는 “일본IBM의 기타시로 회장은 이제 경제동우회 대표로 (일본) 산업계의 얼굴”이라며 “삼성이 10년, 20년후에 일본 산업계의 리더가 될지 모른다”고 추켜세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최근 발표한 최고기술책임자 설문조사에서 ‘사무슨’은 인텔과 함께 ‘향후 10년간 기술로 세계를 리드할 기업’ 공동 3위에 올랐다. IBM, GE가 1∼2위였으며 마이크로소프트는 6위였다. 삼성에 대한 일본 경영진의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사무슨’이란 깃발 아래에 서면 한국은 더이상 일본에게 끌려다니는 ‘시다바리’가 아니다. 삼성은 일본이 80년대 한때 90%를 장악했던 D램 시장에서 일본을 마이너로 추락시켰다. 또 휴대폰 3위를 꿰차며 97년만해도 4위로 버티던 일본 마쓰시타를 지워버렸다. 일본의 아성인 TV조차 삼성은 9%점유율로 소니(9.3%)의 턱 밑까지 치고 들어왔다. 오죽했으면 최근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이 공식석상에서 “일본 전자업체들은 삼성전자를 배워야한다”고 말했을까.
이렇다보니 일본 IT업체들의 시샘도 끊이질 않는다.
“삼성은 정부가 미는 일종의 국책회사다. (민간업체인) 우리가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IMF이후 원화의 가치 하락으로 삼성이 유리한 상황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자금력이다. 우리가 어렵게 개발한 최첨단 장비를 너무 쉽게 손에 넣고 있다” 등등 말도 많다.
그러면서 뒤로는 슬며시 강자 ‘사무슨’과 손을 잡고 싶어한다. ‘도시바와 광디스크장치사업 통합’ ‘소니와 LCD TV용 패널생산 합병업체 설립’ 등이 그것이다. ‘삼성+도시바’는 세계 광디스크장치시장에서 18.8% 점유율로 일거에 2위로 올라서게 된다. ‘삼성+소니’는 LCD패널 1위와 TV 1위 업체간 만남으로 LCD TV 시장을 뒤흔들 전망이다.
그러나 도쿄에 부는 ‘사무슨’ 선풍 소식에 그저 좋다고 우쭐댈때만은 아니다. 실리를 챙겨야한다.
삼성·소니의 협력을 두고 일본 언론들은 벌써부터 “한국이 패널의 압도적 생산거점이 될 경우 일본의 부품·재료 제조업체들이 생산거점을 (구매업체가 있는) 한국으로 옮겨갈 것”이라며 경계의 눈초리를 뜬다. 또 부품·제조업체의 제휴 파트너 1순위로 한국 업체가 급속히 대두해 이러다 부품·재료분야에서도 한국의 도전에 직면할지 모른다고 지적한다. 패널 산업의 경우 부품·재료가 제품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40%에 달하기 때문에 개연성은 충분하다.
우리는 이들의 우려(?)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 부품·재료업체의 생산거점을 우리쪽으로 끌어올 수 있다면 부품·재료산업의 부흥을 이뤄낼 수 있다.
영화 ‘황산벌’의 표현에서처럼 부품·재료산업의 거대한 산인 일본과 한번 “아쌀하게 거시기 해 불”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하고 있다.
<성호철기자 hcs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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