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재권의 대외개방,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의 특허소송 등으로 난관에 처한 국내기업들을 위해 바삐 뛰어다니던 어느날, 나는 청와대로부터 국가 기간전산망 구축팀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관계부처 합동사무국이 편성되어 있던 청와대에서 나는 행정전산망사업과 관련된 국산 중형컴퓨터 개발사업을 맡았고 정보사회 종합대책 수립에도 참여했다.
이 때 같이 일했던 각 부처 인재들이 후일 한국 정보통신산업 육성의 중추 역할을 맡게 됐다. 이 조직은 89년에 해체되는데 나는 이 때 상공부의 정보기기과장으로 보직을 변경하게 되었다.
당시 한승수 상공부 장관은 임명장을 주시면서 “정보산업은 당신이 장관이야. 열심히 해보게!”하셨다. 이 때부터 상공부의 정보산업정책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정책 개발에 주력하게 되었다.
약 3년3개월의 재임기간중 중소기업 정보화 5개년 계획, 산업기술정보원 설립, 소프트웨어단지 구축, 데이터베이스산업 육성대책 수립 등 쉴 새 없이 구체적 정책들을 시행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소프트웨어(SW) 및 데이터베이스(DB)산업 육성 시책이었다.
마치 삼국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상공부·과기처·체신부가 정보산업 주도권을 쥐기 위하여 적극적인 정책개발에 나서던 때였다. 매일 아침에 배달되는 조간신문에 타 부처의 관련 정책이 먼저 발표되면, 담당과장으로서 심한 스트레스를 느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고 업무영역도 다소 중복 되었다. 과기처 산하 소프트웨어산업협회 회장단이 협회를 상공부에서 맡아서 달라고 했다가 과기처의 진노를 산 적도 있다. 데이터베이스산업협회의 창립총회 사실을 미리 알고, 내가 직접 총회장에서 상공부 산하기관으로 유치하자 체신부가 이를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적도 있었다.
지나친 부처간 경쟁은 업계에 부담을 준다. 상공부와 체신부 장관이 비슷한 주제로 동시간대에 회의를 개최해 업계 대표들이 양쪽을 오가며 눈치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95년의 정부조직 개편으로 부분적 정부기능의 정리가 이뤄졌지만,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보산업의 영역다툼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부처간 기능조정이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정보기기과장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좀 더 포괄적인 명칭인 정보진흥과장으로 바뀌었다. 이 때 잊을 수 없는 일은 서울대에 컴퓨터 신기술 공동 연구소를 설립한 일이다. 어느날 황희융 교수님이 연구소 설립안을 들고 우리부를 방문했다. 나는 미국 MIT의 링컨연구소 등과 마찬가지로 산학협동체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적극으로 지원했다. 마침 삼성재단에서 관심을 갖게 돼 이 연구소의 신축자금을 확보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대학내의 산학공동 연구소 설립이 붐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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