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적 지식 의존 합리적 판단 한계
“사농공상에 젖어 기술직들이 언제까지 공직사회에서 엑스트라로 남아야 합니까?” “적체된 박사들을 구제해주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공직자 선발은 어디까지나 정당하고 공정해야 합니다.”
청와대가 민의수렴을 위해 마련한 ‘토론마당’은 최근 이공계 공직 확대 논쟁으로 뜨겁다. 특히 이공계 공직 확대방안 중 하나로 행시와 고시를 통합하기로 하는 등 고시제도가 ‘수술대’에 오르면서 수험생을 비롯해 일선 공무원 등 전국민적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고등고시는 사실 지난 81년 5급 공무원을 공개채용시험으로 전환한 이후 고위 공직 진출의 관문으로서 행정 고도화에 적잖이 기여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 전반을 이끄는 지식정보사회로 빠르게 진입, 과학기술 마인드로 무장한 경쟁력있는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로서 구조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채 출신으로 중앙부처 차관을 역임한 한 관계자는 “각종 정책수립과정에서 과학적 분석력과 전문성에 근거를 둔 합리적 사고에 의한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는 고위 공무원의 수요가 확대되고 있으나 현 고시제도는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단순 법률적 지식에 기초를 두고 인재를 선발하는 전근대적인 고시제도의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무엇이 문제인가=대학·산업체 등 민간부문이나 세계적 추세와는 달리 공직사회에서는 유독 기술고시 출신 기술직들이 태부족하다. 물론 공직 특성상 행정직들의 수요가 기술직에 비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불균형이 너무 심하다. 이는 무엇보다 기술고시 선발인원이 기술직위수에 비해 지나치게 적기 때문이다.
중앙인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 81년 4월 고등고시가 ‘5급 공개경쟁시험’으로 명칭이 바뀐 이래 20년 동안 행정·사법·외무 등 행정직은 1만1843명을 선발한 데 반해 기술고시 합격자는 단 881명에 불과하다. 이는 대략 14대1의 비율이다. 순수 행시 출신만도 이 기간에 3490명으로 연평균 175명인 반면 기시 출신은 44명으로 4분의 1에 그친다. 올해 선발인원 역시 기시는 62명이며 행시는 200명이다.
이같은 상황은 대학 졸업자의 전공 현황이나 일본의 사례에서 심각성이 확인된다. 교육부에 따르면 2001년 대졸자 중 이공계(자연/의학)는 10만805명으로 전체의 45.1%인 반면 인문사회계는 40.9%(9만7963명)에 그쳤다. 일본도 2001년 1종 공무원 공채시험 합격자 중 기술계가 250명, 사무계가 258명이었으나 2002년에는 335명 대 270명으로 역전됐다.
행시에 비해 기시의 채용분야(직렬)가 너무 세분화된 것도 문제. 기시는 현재 전문성을 강조해 기계·전기·화공·농업·환경·토목·건축·전산·통신기술·임업·수산 등으로 모집직렬이 쪼개져 있다. 이렇다보니 일반행정가(generalist)적 능력을 쌓기 어려워 보직 부여 자체가 제한되고, 보직 이동시 적응이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기시 출신들이 주로 정책업무보다는 집행부서에 배치되는 것도 같은 맥락. 실제로 최근 3년 동안 기시 합격자 131명 중 절반에 가까운 58명이 조달청·산림청·특허청 등 외청에 배치됐다.
시험과목이 비현실적으로 이뤄진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 특히 행시의 경우 지나치게 법률 중심으로 구성됐다는 지적이다. 황윤원 한국행정연구원장은 “시험과목이 헌법·행정법·민법 등 법률과 일반행정 중심이어서 실제 현장에서 필요한 지식과 소양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시 역시 시험과목 편성이 기술행정가 선발시험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팽배하다.
◇대안은 무엇인가=고시제도를 존속시키는 한 사회변화와 행정수요에 맞게 고시간 채용인원의 균형을 잡는 것이 급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서울공대 한민구 학장은 “고등고시 제도는 5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다. 고등학교나 대학은 이과가 문과보다 많은데 왜 공직만 기술직이 턱없이 부족해야 하는가. 행정 특성을 감안한다 해도 정보화 등 새로운 행정수요를 감안, 최소한 행시의 50%까지는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기술직의 행정수요를 집중 발굴해 일선 정부부처의 기술직위를 늘리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정부부처가 기술직 TO 책정에 인색한 상황에서는 기술고시 채용인원을 늘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처럼 고시통합이 빠를수록 좋다는 견해도 높다. 공직사회의 기술직 경시 풍조를 해소하고 행정직과의 인적 네트워크 형성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리적 통합이 불가피하다는 것. 이병기 한국공학교육학회장(서울대 교수)은 “등용문을 일원화해 정서상 행정직·기술직 모두 ‘동기’ 의식을 갖고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 협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초기술연구회 정명세 이사장은 “통합의 전제조건으로 우수 과학기술인력의 공직 진출을 위해 자격증·학위 소지자 등의 특채를 (통합)행정고시에 편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험과목의 재조정도 시급하다. 공직생활에 필요한 행정 및 관리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기시 시험과목에 행정법·행정학·정책학 등을 신설하고 행시는 과학적 마인드 형성을 위해 자연과학개론 등을 필수로 넣어야 한다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성신여대 정택동 교수는 “현 행시과목은 사법시험과 불과 몇과목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며 “고급 공무원들에게 법률상식은 필수적이겠지만 기본적인 법률지식과 마인드를 확인하는 선으로 선발기준을 낮추고 산업적인 마인드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고시제도는 점진적,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궁극적으로 공무원 채용방식에 대해 현재의 고시제도보다는 장기적 마스터플랜속에서 선진국형 제도를 벤치마킹하며 국내 정서를 감안한 신 한국형 임용제도 도입을 검토할 시점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
<1981∼2000년 고등고시 합격자수> 단위:명
구분=기술고시=행정고시=사법시험=외무고시
합계=881=3490=7765=588
연평균=44=175=388=29
비율(기술고시 기준)=1=4=8.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