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공대엔 학과가 없다?
‘바이오 연구자와 공학자가 어떻게 하면 공동 연구를 잘 할 수 있을까.’
지난 2000년 미국 애리조나주의 툭손시. 미 국방연구소(DARPA)에서 주관하는 융합기술의 한 분야인 마이크로플루이딕스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연구책임자들의 회의주제였다. 여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두 그룹의 특징을 서로 이해하는 데서 찾았다. 각 그룹의 문화적인 차이점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 상승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다학제적 연구 방법론과 철학을 세웠다.
세계적인 조사 연구기관인 미국 랜드연구소가 발표한 ‘세계 기술혁명 2015년까지-바이오·나노·재료공학의 최신 흐름과 정보기술과 시너지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혁신되고 있으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학문을 통합하는 다학제적 연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보고서는 단순히 기술적 측면에서만 융합기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융합기술에 대한 사회적 준비가 기술발전에 관건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세계의 융합기술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미국의 기초체력(fundamental)이 바로 여기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미국 사회는 이러한 기술의 미래적 변화를 빠르게 수용하기 위해 사회 전반으로 융합에 대한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무엇보다도 주력하고 있다. 단순히 융합기술 개발의 몫이 과학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에 적극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공학교육의 산실이라 불리는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실용적 학풍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그 곳에서 융합기술 연구소를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MIT는 융합기술 개발은 물론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문화적 충격에 유연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기존 구조를 타파하자=지금 MIT 캠퍼스는 온통 공사중이다. 새로운 건물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MIT 캠퍼스는 수많은 공사 차량과 인부로 혼돈을 겪고 있는 듯하다. 새로 짓는 많은 건물 중에서 언제 무너질지 모를 것 같은 이상한 형태의 건물이 눈에 띈다. 새로 만들어지는 컴퓨터사이언스 연구소 건물이다. 엄청난 크기의 철판을 손으로 구긴 듯한 모습의 외벽. MIT가 직육면체 대학 건물이라는 기존의 질서와 틀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대학과 교수진은 가장 변혁하기 힘든 집단으로 분류된다. 오랫동안 쌓아온 지식의 깊이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기 때문이다. 이런 습성으로 전자공학을 전공한 사람은 당연히 전자공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돼야 하는 구조다. 그러나 MIT는 최근 이런 구조에 대대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기존 대학 구조의 핵심인 ‘학과’의 개념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다. 실용적인 학풍과 공학의 최고 명문답게 기술의 발전을 위해 기존에 틀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새로운 컴퓨터사이언스 연구소 건물처럼 말이다.
MIT 기계공학과 로저 캄 교수. 그는 분명히 기계공학과 교수였지만 그의 사무실은 바이오엔지니어링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찾아간 곳에서 그의 명함을 받아들었을 때 그가 왜 바이오엔지니어링 건물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캄 교수의 명함에는 두 개의 직함이 있었다.
기계공학과 교수이면서 동시에 바이오엔지니어링 학제 간 프로그램의 교수. 절반은 기계공학을, 또 다른 절반은 바이오엔지니어링을 교육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연구실의 학생도 반씩이며 캄 교수의 월급도 반은 기계공학과에서, 반은 바이오엔지니어링 프로그램에서 나온다. 한 명의 교수가 학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서로 다른 분야의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유연한 시스템인 것이다. MIT의 학과 개념이 사라지고 있음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최근 임용된 기계공학과의 토드 톰슨 교수는 UC버클리에서 감염질환을 공부했던 순수 생물학자였다. 그런 그가 MIT의 기계공학과 교수로 임용된 것이다. MIT에서는 생물학자가 기계공학을 가르치고 기계공학자가 바이오엔지니어링을 교육하며 가장 변화하기 힘들다는 교수진부터 기존의 틀을 벗고 있었다.
톰슨 교수는 “감염질환을 공부하던 중에 질환을 쉽게 판별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기와 화학적 방법을 동원해 질환을 판별하는 키트를 만들면서 미세유체조작기술과 멤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기계공학을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과학적 접근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자신의 실례를 통해 실생활에 적용하는 융합기술의 필요성을 전달하고 있었다. MIT는 결국 교수들에게 전공에 대한 깊은 이해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진정한 융합기술 교육자를 원하고 있었다.
◇MIT의 융합기술=MIT 마이크로플루이딕스 연구소에서는 컴퓨터로 유동 현상을 푸는 전산유체역학의 스케일을 줄이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이 연구소에서는 미세혈액유동과 혈관내피세포·평활근세포 등의 상관관계에 대한 실험 및 이론 해석에 치중하고 있다. 이런 연구는 기관지와 폐 등 호흡기의 공기흐름과 혈액의 동맥경화 원인을 규명할 수 있다. 이 연구소는 이를 통해 기관지와 천식 등의 원인을 규명하고 궁극적으로 신약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근에 이 연구소는 유전자나 단백질의 3차구조 등 나노스케일 현상에 영향을 주는 외부 힘에 대한 해석으로 연구방향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각종 세포의 물성 및 기계적 거동에 관한 세포역학(cell mechanics), 인체 내 장기손상시 체외에서 장기를 배양해 대체하는 조직공학(tissue engineering)도 다룬다. 장기의 기초가 되는 세포의 분화와 번식, 조직의 형성에 기계적 자극(mechanical stimuli)이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최적의 배양조건을 조성하는 연구를 한다.
◆ 인터뷰 - 마이크로플루이딕스연구소 로저 캄 교수
“중요한 것은 학자의 호기심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연구 분위기입니다.”
MIT 기계공학과에서 마이크로플루이딕스 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로저 캄 교수는 학과의 경계나 개인 실험실의 테두리를 과감하게 철폐하는 시도가 MIT에서 요구하고 있는 교육과 연구의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대학에서는 이러한 연구를 더욱 더 장려하고 있으며 우수한 학생들의 호응도 높습니다.”
그는 지금 대학과 학생들이 서로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은 길인가를 잘 알고 있다며 이것이 바로 MIT의 경쟁력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기계공학과 교수였던 캄 교수는 예전부터 해 오던 전산 유체역학에서 최근에는 미세혈액유동과 혈관내피세포 등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쪽으로 연구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기계공학자였던 그는 순수 생물공학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유전자나 단백질의 3차 구조 등 나노스케일 현상에 영향을 주는 외부 힘에 대한 해석에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MIT에서는 이제 한 명의 교수가 하나의 특정 주제 연구실을 가지는 시대를 넘어섰다.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전공의 교수와 학생들이 공간을 공유하고 교수와 학생은 모두 필요한 지식을 적시에 효율적으로 습득할 수 있게 됩니다.”
캄 교수는 학교뿐만 아니라 MIT의 우수한 연구진을 확보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MIT의 연구시스템을 배우고 유능한 인재를 수급하려는 기업들이 관심있는 연구소가 위치한 학교 내 건물에 비용을 지불하고 들어옵니다. 기업들은 새로운 융합기술을 가장 먼저 습득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기술적 측면에서만 융합기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융합 기술에 대한 사회적 준비가 기술발전의 관건이라며 인프라가 되는 대학의 역할을 강조했다.
<보스턴(미국)·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kr>
☞ 6회부터는 세계 융합기술 전쟁의 또다른 축인 유럽편을 다룰 예정입니다. 현지 취재일정으로 인해 9월 16일부터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