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4월께인가 일본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제작한 ‘반딧불의 묘’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세계대전에서 패전할 무렵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두 남매가 몸둘 곳이 없어 떠돌다 죽어가는 가슴아픈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사실 내가 애니메이션업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것도 그때 받은 감흥 때문이었다. 또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명작들을 접하며 ‘나도 언젠가는 꼭 저런 작품을 만들어야지’라는 꿈을 키워오면서도 그때의 감흥은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박세형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도 지난 79년에 있었던 12·12 군부 쿠데타가 배경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파괴되는 인간상을 사실적인 영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를 통해 요즘 나는 드디어 ‘반딧불의 묘’와 같은 작품에 참여한다는 보람을 느낀다.
애니메이션 일을 하는 사람치고 이같은 보람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껏 보아 온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은 현재 창작을 하거나 하청을 받아 일을 하건간에 애니메이션이 좋아서 힘들고 고된 작업을 견뎌내는 사람들이다.
물론 지난 2000년을 전후해 불기 시작한 벤처 열풍은 애니메이션업계에도 거품을 만들어내면서 소위 말하는 ‘황금알’을 찾아 이 분야에 들어서는 사람도 적지 않게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애니메이션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이내 좌절하고 떠났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현대 한국 창작 애니메이션은 지난 97년 투니버스에서 제작한 ‘영혼기병 라젠카’를 기점으로 다시 시작됐다. 당시 주요 작품들을 기획하고 제작을 주도한 386세대들은 지금도 주요 작품마다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한국 창작 애니메이션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사실 한국의 창작 애니메이션은 이제 일곱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선후배나 동료들은 오직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도 새삼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최근들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료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다. 그렇지만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지치지 말자’며 서로를 격려하는 선배가 있고, 오직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힘든 일도 꿋꿋하게 견디는 후배들이 있어 내가, 아니 우리가 꿈꾸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김의건·프리랜서 애니메이션 PD kgunn22@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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