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줄거리: 혼다 지카라로부터 JTT 인사과장 요코다 도시오의 청부살인에 관한 전말을 들은 에이지와 히로코는 아키라의 전처 에리카를 만나기 위해 보스턴을 방문한다.
1999년 6월 16일
뉴저지주 서밋시
뉴욕의 왼쪽에 있는 뉴저지주는 별명이 가든 스테이트라고 하듯이 수목이 많다. 고야노상의 집은 맨해튼에서 서쪽으로 반 시간 정도 드라이브 거리의 서밋이라는 곳에 있는데 외견은 수수하나 내부는 박물관 못지 않게 골동품과 미술품이 많다. 애들이 이미 사회에 진출하여 둘은 넓은 집을 지키고 살고 있다. 일층 한 구석에는 일본식 후로바(목욕실)가 있는데 소나무로 된 욕조에 더운 물을 가득 채우고 들어앉으니 전면이 유리로 된 벽으로 정원이 내다보인다. 고야노는 일본식 생활을 미국에서 더 화려하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이지는 생각이 여기 미치자 부러움과 자신의 실패감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나무라듯 물을 휘젓는다.
“오하이오.”
“오하이오 고자이마스.”
목욕을 하고 나오니 식탁에는 이미 셋이 둘러 앉아 에이지를 기다리고 있다. 에이지는 어디 가나 굼뜨다. 미소시루(일본식 된장국)를 마시고 나니 여독이 풀리는 것 같다. 역시 나는 일본토종이야 하며 담배를 꺼내 드니 히로코가 무릎으로 툭 친다. 이 집에서는 금연인 모양이다. 눈치를 챈 듯 고야노가 “괜찮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담배를 피면 이류시민(second class citizen) 취급을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하며 껄껄 웃는데 에이지는 밥맛이 또 한번 상한다. 에이지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물고 주변을 살피니 쾌적한 동네다. 여기에는 누가 살고 이 사람들은 무얼 해 먹고 사나… 낯선 곳엘 가면 늘 떠올리는 의문이다.
한참을 지나니 고야노댁의 차고가 열리고 어제와는 또 다른 차가 나온다. 은색의 밴이다. 뒤에 짐을 싣고 넷이 타도 편안한 공간이다.
고속도로를 한 이십분을 달리니 차가 막힌다. 맨해튼으로 들어가기 위한 링컨터널입구다. 차가 멈춘 일순 어디선가 흑인아이가 튀어나와 자동차의 유리창을 스폰지 막대기로 닦기 시작한다. 차가 서서히 굴러도 같이 걸으며 닦더니 운전수석의 차창에 손을 내민다.
“뭐예요?” 에이지가 불안하게 묻는다.
“아 구걸이지요. 쟤들은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소득재분배의 차원에서 매일 조금씩 주고 있어요”하며 창문을 내리더니 1달러짜리 지폐를 두개 건넨다. “흑인들을 이해하고 같이 사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한 미국에서 살기는 힘들지요.” 고야노가 말한다.
“어머 고야노상은 참으로 자유주의자같아요”하고 히로코가 칭찬을 한다.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에이지도 이 말에는 찬성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때 조용히 있던 고야노 부인이 입을 연다. “실은 우리 주인양반은 전학련의 극렬멤버로 결국 일본대학을 다니다 졸업을 못하고 미국으로 일찍 이민을 와버렸어요. 일본의 보수주의에 대한 반발로 인생의 길이 바뀐 셈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평범한 일본인의 길을 상실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처음에는 매우 어렵고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회사원이 되고 가정을 꾸민다는 것이 일본인의 표준적인 가치관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아왔어요.” 고야노의 말에 고독이 배어 있다. 에이지는 연민을 느끼며 한 마디 거든다.
“하지만 제 경우는 방금 말씀하신 표준적인 인생으로서 일본의 공기업에서 평생을 보냈지만 아웃사이더로서 살아오긴 마찬가지예요.”
“왜 그럴까요?” 하며 묻는 고야노의 음성에 한결 친근감이 묻어 있다.
“지금부터 찾아가는 에리카상과 그녀의 죽은 남편 후지사와 아키라도 모두 일본의 기준으로는 아웃사이더들이라고 할 수 있네요….”
중년을 맞은 남녀들의 쓸쓸한 인생의 회고가 잠시 멈춘 사이 차는 맨해튼을 통과하여 브루클린 브리지를 지나 북동으로 향하는 중이다.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성과 같은 맨해튼이 급속히 작아지며 깊은 수목 사이로 고속도로가 펼쳐진다. Interstate Highway 95. 미국 최북동부의 메인주에서 최남동부의 플로리다주까지 열네개의 주를 통과하는 I-95는 미국의 주요 고속도로시스템 중의 하나다. 뉴욕을 지나 일곱 시간이면 브랜다이스 대학이 있는 월덤(Waltham)에 도착할 게란다.
뉴욕주를 벗어나면 동북쪽으로 뉴잉글랜드가 펼쳐진다.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 햄프셔, 그리고 메인의 6개 주다. 한 두어 시간 달리니 도로표지판에 뉴 헤이븐이라는 단어가 출몰한다. 명문 예일대학이 있는 곳이다.
“우리 뉴 헤이븐에서 점심 먹고 가요. 나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예일대학이 제일 멋있게 느껴졌는데” 다즈코가 말한다.
“그런데 대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브랜다이스대학(Brandeis University)이란 어떤 대학입니까? 일본에서는 별로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에이지의 물음이다.
“글쎄요… 잘 모르지만 우리 애들이 대학 진학할 때 들은 바로는 유태인들이 세운 명문사립대학으로 알고 있습니다. 같은 유태인이 지배하는 뉴욕타임스라는 미국 최대의 신문이 격찬할 정도로 작지만 우수한 대학이라는 겁니다. 다만 보스턴 근처에 워낙 유명한 대학이 많아 그늘에 가려 있다고나 할까…” 고야노의 설명이다.
“그런데 에리카상은 정말 그 브랜다이스대학의 교수와 결혼을 한 건가요?” 히로코가 묻는다.
“글쎄… 그렇지 않겠어? 만나보면 알겠지.” 대답을 하는 에이지에게 힘이 하나도 없다. 에리카는 사실 에이지가 사랑하던 여자가 아닌가? 아키라에 빼앗긴 후 이제는 미국남자에게 또 한번 빼앗겼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먹으러 들른 뉴 헤이븐은 외부의 이미지와는 달리 근로자들이 많은 평범한 고장이다. 최근에 이 고장의 경기가 침체한 탓인지 고색창연한 건물들만 눈에 띌 뿐 활기가 별로 없다. 예일대학 부근의 피자팔러에 들러 피자를 먹으며 고야노가 입을 연다.
“멋있는 고장을 연상했는데 실망하셨지요? 우리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며 동경하던 소위 Good old America는 이제 없다고 봐야 되요. 1960년대, 70년대의 미국은 특별한 미국이었고 우리가 영화와 팝송으로 알게 된 환상의 미국이라고 봐야 할 거예요.”
차를 타고 다시 I-95에 오르자 다즈코가 히로코에게 조용히 묻는다.
“히로코짱, 후지사와 아키라라는 분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쯤 됐으니 속 시원하게 털어놔봐.”
히로코는 금방 대답을 못한다. 앞의 조수석에 탄 에이지에게 히로코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필경 에이지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 제가 간단히 말씀드리죠. 여행가이드에 대한 보답도 할 겸” 에이지의 조크에 아무도 웃는 이가 없다.
창밖으로는 뉴잉글랜드의 경치가 펼쳐진다. 짙은 수목. 흰벽과 붉은 지붕의 집들. 말 목장. 유월의 뉴잉글랜드를 배경으로 세 사람은 에이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도쿄대학의 데모에서 시작하여 고베에서의 청부살인까지….
에이지의 독백이 끝난 무렵 차는 매사추세츠주에 들어선다. 어색한 침묵을 깨듯이 고야노가 말한다. “매사추세츠주는 미국의 정신적 지주라는 프라이드가 대단해서 자동차번호판에 America’s Spirit이라고 써 놨지요. 저거 보세요. 그리고 고속도로도 구식으로 턴파이크라 불러요.”
“그럼 에리카상에게 어디까지 말할 거예요?” 다즈코가 걱정되는 듯이 묻는다.
“글쎄요…. 저로서는 우선 아키라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큰 일이고 그리고 나서 분위기를 봐서 아카라의 과거에 대하여 물어볼 생각입니다.”
“대학시절 에리카상을 좋아했나요?” 다즈코의 물음이다.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허를 찔린 듯 에이지가 대답한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여자의 감이죠.”
여자의 감이 대단하구나 에이지는 느낀다.
“자 고속도로에서 128번 도로로 나갑니다.” 고야노가 분위기를 바꾼다.
브랜다이스대학은 보스턴시의 서쪽 월덤이라는 작은 시에 위치하고 있다. 월덤에 들어가니 그럭저럭 오후 4시. 대학을 찾아가도 교수를 찾기는 늦은 시각이고 피곤하여 우선 하루 쉰 후에 내일 아침 찾아가기로 한다.
“그럼 보스턴으로 가지. 월덤에는 이렇다 할 호텔이 없을 거야.”
모두는 고야노의 말에 승복한다.
자동차는 계속 달리고 창밖으로는 보스턴과 주변도시를 가르는 찰스강이 흐른다.
sj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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