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들은 돈에 관한 한 완고하고 신중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독일인들도 90년대 후반 전 세계를 휩쓴 첨단기술주 열풍에서 비켜나지는 못했다. 독일 증권거래소가 97년 미국의 나스닥시장을 본뜬 ‘노이어 마르크트(신시장)’를 프랑크푸르트에 개설하자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자자들이 대거 몰렸고, 노이어 마르크트는 곧 유럽 최대의 첨단기술주 시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난해 9월, 독일 증권거래소인 도이체뵈르제가 노이어 마르크트를 올해말까지 폐쇄한다고 발표하면서 독일인들도 허공 속에 사라진 자신들의 돈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있다.
일본의 나스닥재팬과 스위스의 뉴마켓이 지난해 8월 폐쇄를 결정한 데 이어 독일마저 노이어 마르크트의 문을 닫는다고 발표하자 한국의 코스닥시장 등 다른 기술주 시장들도 비슷한 길을 걷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첨단기술주 시장의 잇단 몰락은 ‘신경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세계 경제에 도래했다는 믿음을 송두리째 깨뜨리는 동시에 2000년 초 나스닥 붕괴 이후 첨단기술주 거품이 꺼지는 과정이 여전히 진행중임을 다시 한번 실감나게 해주었다.
노이어 마르크트는 설립 당시만 해도 은행대출 위주의 자금조달 방식에 익숙하던 독일 경제에 주식시장을 통한 직접 금융시장을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고 출범했다.
통신업체 모빌콤을 비롯해 수많은 IT기업들이 급성장하면서 3년만에 상장회사가 350개로 급증했다. 상장 하루만에 주가가 2배로 오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2000년 3월 시장 전체의 시가총액은 2342억유로(약 280조원)에 이르렀다.
이런 성공신화는 첨단기술주의 거품이 빠지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 상장회사들의 회계부정이 잇따라 터지면서 시장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갔다.
가장 대표적인 스캔들을 일으킨 업체는 자동차 내비게이션 개발업체인 콘로드다. 99년에 상장된 이 회사는 2001년 매출액의 98%가 가짜 매출전표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상당수 상장기업들의 주식이 휴지 조각으로 변하면서 노이어 마르크트의 네막스50지수는 2년반만에 고점에서 95%가 빠졌다.
부정 스캔들이 늘면서 노이어 마르크트에 상장되는 것 자체가 기업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상황에 이르렀다. 2000년 135건에 이르던 기업공개(IPO)가 2001년에 11건, 지난해에는 1건에 그쳤으며 대부분의 상장회사들이 노이어 마르크트에서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나스닥재팬도 상황은 비슷했다. 나스닥재팬은 지난 2000년 6월 일본 정보통신업계의 신화적 존재로 군림하던 재일동포 2세 사업가 손정의씨가 이끄는 소프트뱅크와 미국의 나스닥이 공동으로 출자해 설립됐다.
우수한 벤처기업을 발굴해 투자에서 상장까지 책임지겠다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의 야심찬 계획과 전 세계에 24시간 주식거래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나스닥의 야망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첨단기술주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나스닥재팬은 결실도 맺지 못한 채 꿈을 접어야 했다.
애초 목표는 2001년 말까지 850개 회사를 상장시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제 상장회사는 100개 남짓에 그쳤다.
해외 첨단기술주 시장이 잇따라 문을 닫기로 하자 코스닥시장도 같은 길을 걷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코스닥종합지수는 2000년 3월 10일 고점(283.44)에서 80% 이상 빠졌다.
정보기술 경기부진, 수급악화, 시장 신뢰성 추락 등의 3대 악재로 투자자들의 투자심리가 냉각돼 극도의 침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독일 노이어 마르크트와 마찬가지로 대주주 및 경영진의 불공정 거래로 시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제 특단의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 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코스닥시장이 다른 여러 나라들의 첨단기술주 시장의 뒤를 잇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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