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2위 경제 대국인 일본이 10여년간 계속되는 장기 불황으로 휘청거리자 덩달아 IT업계들도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지난해 터진 미증유의 9·11 테러는 세계적 IT불황을 심화시켰는데 이에 IT를 국가전략으로 삼아 경기부양을 도모하려던 일본 정부의 계획도 차질을 빚었다. 지난해 1월 일본 정부는 고도정보통신네트워크형성기본법(일명 IT기본법)에 의거,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IT 전략본부를 설치해 민관 합동으로 IT혁명을 주창한 바 있다. 이에 따라 5년 이내에 세계 최첨단 IT국가가 될 것을 목표로 삼은 ‘e재팬 전략’이 나왔는데 이는 2005년까지 디지털가입자회선(DSL) 등 고속인터넷 이용자를 3000만 가구로, 또 광섬유 초고속인터넷 이용자를 1000만 가구로 각각 확대할 것을 행동계획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컴퓨터시장의 40∼50%를 차지하는 미국 경제가 IT불황기에 접어들면서 일본 IT산업도 수출부진 등 곤경에 처해 있다.
일본의 대표적 컴퓨터업체인 NEC와 후지쯔 등은 지난해 생산량을 15%씩 감축하기도 했다. 그럼 일본의 IT산업은 이대로 추락하고 말 것인가. 이에대해 대부분의 일본 전문가들은 “일본의 IT혁명은 세계경기가 주춤거림에 따라 잠시 정체곡선을 그리고 있을 뿐이지 성장 엔진이 멈춘 것은 아니다”며 노(no)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소프트웨어 표준화 컨소시엄인 OMG(오브젝트매니지먼트 그룹)의 일본 대표 가마타 히로키도 낙관론을 펼치는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는 “일본 소프트웨어산업 불황의 가장 큰 원인은 창조적 인재를 길러내지 못하는 교육과 사회 시스템이다”고 꼬집으며 “하지만 일본은 세계 최고의 제조업을 바탕으로 IT분야에서도 조만간 세계 최강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비치고 있다. 실제 일본 IT업체들은 “세계 IT시장의 지도를 바꾸겠다”고 호언하며 발걸음을 빨리하고 있다. 소니, 도시바, 마쓰시타, 샤프, JVC 등 세계 굴지의 전자업체들은 가전이라는 꼬리표를 잘라내고 IT기업으로 변신하며 세계 최강 IT 일본의 견인차가 되고 있다. 이들은 IBM, 마이크로소프트, HP 등 세계적 IT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시장 공략 속도를 점차 높이고 있다.
안도 구니타케 소니 사장이 “소니는 더 이상 가전 업체가 아니다”고 선언한 것이 벌써 오래전 일이다. 실제 이 회사는 PC, 통신, 게임, 엔터테인먼트 등 IT분야의 사업을 강화하면서 이익이 나지 않는 가전 사업은 과감히 정리했으며 ‘플레이스테이션2’라는 첨단 게임기를 앞세워 세계 IT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일본 IT업체들의 사업 영역도 PC와 게임기 중심에서 개인휴대단말기(PDA), 이동전화기 등으로 점차 분야도 확대되고 있다. 소니 이외에도 히타치, 마쓰시타, 도시바 등 내로라 하는 업체들이 IT분야 전반으로 일본 기업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이 일본을 이끄는 두 축인 전기전자제조업체와 자동차업체가 중국과 함께 세계 시장 재도약을 노린다는 점. 버블경제 붕괴 후 ‘잃어버린 10년’을 버텨온 일본 경제가 중국과 힘을 합쳐 세계 시장 제패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두말할 필요없는 떠오르는 시장인데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중국 경제심사보고서에서 올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실질성장률이 7.5%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또 2003년에도 7.25%의 고성장을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중국 역시 고민을 갖고 있다. 중국 메이커들은 최근 저가 가전제품의 중국내 시장 포화, 기술력 부재로 인해 해외 경쟁력 약화라는 시련을 맞고 있는데 이 때문에 일본 업체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특히나 두 국가가 국교 정상화 30주년을 맞는 올해를 계기로 일본과 중국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데 중국의 WTO 가입을 계기로 일본 기업들의 중국 진출이 활발해지더니 최근 들어서는 단순 투자나 공장 이전 등이 아닌 제휴를 통한 ‘윈-윈’ 협력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올해초 업계를 들썩이게 한 산요전기와 하이얼집단간의 전격 제휴를 시작으로 이후 마쓰시타전기산업-TCL집단, 도시바-TCL집단, NEC·마쓰시타전기공업-화이웨이집단, 스미토모상사-하이센스집단 등 대형 제휴가 잇따랐다. 이는 지금까지의 단순 공장 이전 대상으로만 중국을 보던 일본측의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중국쪽 파트너들이 중국내 최대 업체라는데 제휴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산요-하이얼 제휴는 일중 주요 업체간 최초의 포괄적 제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일본내 합병회사를 설립, 하이얼의 제품 판매를 산요가 맡는 대신 산요는 하이얼의 판매망을 이용해 중국 시장에 진출한다. 마쓰시타-TCL의 경우 TCL이 마쓰시타에 저가격TV를 OEM방식으로 제공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한 도시바-TCL은 자본제휴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NEC·마쓰시타전기공업-화이웨이는 제3세대 이동전화의 연구개발을 함께 진행하다는 점 등이 새롭다. 이밖에 산요전기가 PDP, 액정프로젝터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국내 생산키로 결정하거나 일본내 주요 반도체메이커인 NEC, 후지쯔, 미쓰비시, 도시바 등이 중국내 반도체 생산기지를 대폭 강화하고 나서는 등 중국 생산 거점을 중시하는 풍토가 일본내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전기전자제조업체는 그간 중국을 포함한 한국, 대만 등 아시아국가로부터의 저가 공세에 밀려 고전해 왔다. 이에 일본 혼자 힘으로는 세계 IT경제를 거머쥘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중국 업체와의 제휴, 중국으로부터 OEM방식의 납품을 받음으로써 가격 경쟁력을 회복한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도 정보가전 등 신제품을 들여와 중국내 경쟁에서 살아남고 기술력을 높여 해외 경쟁에 임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갖고 있는 상태다. 내년 하반기나 돼야 세계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가전으로 세계시장을 제패했던 일본 IT업체들은 이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신발끈을 단단히 조여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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