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인 더 뉴스>정형문 한국EMC 사장

 “다국적 IT기업에 다닌다고 목에 힘 주지 마라. 월급 많이 받는다고 소비수준 올리지 마라. 타부서의 업무와 애로사항을 정확히 파악해라, 조직에서 성공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돈 버는 게 목적이면 한몫 잡을 수 있는 다른 곳으로 가라.”

 여의도 63빌딩에 위치한 한국EMC의 직원들은 거의 매일 이런 ‘잔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 다국적기업에 너무 어울리지 않고, 너무나 사적인 말들이다. 더욱이 신세대들에게는 고리타분한 구세대의 우려로 여겨질 만한 충고를 쏟아붓는 주인공은 정형문 한국EMC 사장(45세)이다.

 이런 잔소리를 듣는 직원들이 정 사장을 두고 의사소통 안되는 꽉막힌 CEO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실제상황은 정반대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정 사장의 조언과 훈시를 성공을 위한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고 있다. ‘외국계 IT기업의 CEO로서 독특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성공을 거둔 만큼 사장의 일거수 일투족에는 뭔가 있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정 사장은 외국계 IT기업 CEO로서는 특이한 기록을 달고 다닌다. 95년 7월 ‘원맨 오피스’로 한국EMC를 설립한 정 사장은 다국적 IT기업의 현직 지사장 중 최장수 기록을 갖고 있다.

 8년이면 오래 했고 시장상황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만큼 “장수기록을 얼마나 더 연장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정 사장은 “본사에선 내가 나갈까봐 오히려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받아쳤다.

 정 사장의 이런 자신감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EMC가 외국계 IT기업의 지사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의 하나로 꼽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외국계 IT기업의 경우 한국 지사의 매출은 전세계(본사) 매출의 1∼2% 정도다. 한국EMC의 매출비중은 평균 3%대이며 때에 따라서는 4%를 넘는 경우도 있다. 한국EMC는 각국 EMC 지사 중에서 세계적으로 5번째로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 정도면 정 사장의 자신감도 이해될 법하다.

 정 사장은 본사 차원에서 일반적인 한국 지사장이 부여받는 디렉터급의 지위를 넘어 부사장급 대우를 받고 있다. 또한 아태지역에서는 스티븐 핏츠 총괄사장 등과 함께 아태지역의 주요 이슈에 대해 의사결정을 하는 ‘아태지역 3인방’으로 통한다.

이쯤에서 이렇게 성공한 비결을 물었다. “물론 제품이죠. EMC 제품을 써 본 고객은 다시 찾고, 다른 고객에게 추천합니다. 제품 경쟁력이 한국EMC 성공의 가장 기본 토대입니다.”

 정 사장이 꼽는 두번째 이유는 ‘환상적인 맨파워’. 정 사장은 “97년 7월 지사가 문을 연 이래 5년간 회사를 나간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점이 한국EMC 조직의 응집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01년 50여명의 인력이 퇴사하는 구조조정을 처음 단행한 이후에도 연간 퇴직률은 1% 이하에 머물고 있다. 어쨌든 일할 만한 직장으로 느끼고 있고, 이 힘이 조직의 힘이 아니겠냐는 것.

 세번째는 ‘협력업체의 공’이다. 처음 출범 당시 본사에서는 직접판매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 사장은 이때 “한국 시장은 내가 잘 안다. 그 방법은 안된다”며 본사 방침을 결사반대했다. 지금까지 한국EMC는 100% 간접판매를 고수하고 있다. 그 시절부터 맺고 있는 협력사가 대인정보, 데이타게이트, 에이아이컴 등이며 현재 한국EMC를 만들어 놓은 숨은 공신들이다. 협력사를 ‘원 오브 뎀(one of them)’으로 취급하면 협력업체로부터 시너지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정 사장의 철학이 그대로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게 다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한국EMC를 만든 정 사장 나름의 철학, 본사조차 인정하고 있는 ‘한국EMC 문화’를 들여다봐야 한다.

IMF 외환위기 때 정 사장이 이 개량한복을 입고 본사를 방문한 일은 지금도 한국EMC의 직원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는 전설이다. 당시 본사는 국내상황을 들먹이며 신용장(LC)을 개설할 은행들을 직접 지정하고, 거래시 고객사로부터 담보설정을 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 사장은 개량한복을 입고 본사를 방문했다. “당신이 입고 온 옷이 뭐냐”는 질문에 “한국의 턱시도”라고 답한면서 정 사장은 한국적 상황에 바탕을 둔 본사 정책을 요구했다. 정 사장은 “우리가 거래하는 기업들이 망하면 한국이 망하고 한국EMC가 망한다. 그 기업들은 절대 망하지 않고 내가 있는 한 한국EMC는 망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때 정 사장은 오히려 2000만달러 외상 거래를 본사로부터 얻어냈다. 이 덕에 당시 국내 기업 중 상당수는 외상으로 제품을 받게 됐다.

 “어려울 때 도움받은 사람들은 절대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다”는 정 사장의 말은 현재의 한국EMC를 이어가는 끈끈한 고객관계의 밑천으로 이어지는 기본 힘이라는 해석이 나올 만도 하다.

 무모하다고도 할 만한 정 사장의 경영스타일은 이번에도 통했다. 비록 현물이라 할 지라도 2000만달러(약 240억원)를 지원받아 최근 한국에 솔루션센터를 개설한 것. 63빌딩 15층을 차지한 솔루션센터는 미국 경기침체 등을 반영한 본사 분위기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본사 임원진 대부분은 정 사장의 제안을 ‘재고할 가치도 없는’ 사안으로 취급했지만 정 사장은 일본에서 EMC 본사 CEO를 만나 설득했다. 정 사장은 본사 CEO를 독대하는 자리에서 “경기가 요동쳐도 이런 투자를 해야한다”는 말로 설득했다. “두고 보세요. 경쟁사 제품까지 여기서 벤치마킹 테스트가 진행될 것입니다. 솔루션 센터를 방문한 고객들은 EMC 제품의 성능과 품질의 우수성을 직접 확인하고 한국EMC의 힘을 실제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솔루션 센터의 성공을 확신했다.

 정 사장은 3년 전부터 ‘지휘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제목의 은퇴사를 쓰고 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연주가 끝나면 단 한번 돌아 인사하고 퇴장하지 않습니까” 정 사장은 “더 이상 이 조직에서 내 역할이 필요 없어지면 과감히 인사하고 퇴장해 IT분야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국적 IT기업의 한국지사, 그리고 그 지사장 할 일이 무엇인지 맥을 짚을 때가 됐다”는 정 사장의 직언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닐 듯하다.

 

 <약력>

 △57년 전라남도 영광 출생 △83년 한국외국어대학 러시아어과 졸업 △83년 동아컴퓨터 입사 △87년 코리아에이컴 입사 △94년 한국실리콘그래픽스(현 SGI코리아) 입사 △95년 EMC 한국지사 설립 및 지사장 △현재 한국EMC 사장

 

 

 <신혜선기자 shinhs@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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