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정의 시네마테크>오아시스

 이창동의 영화는 재기발랄하지도 감각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현학적이거나 짐짓 폼을 잡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투박하고 겸손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성이 있다. 이창동 영화의 진정성은 치열하다. 그래서 종종 보는 이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초록물고기’나 ‘박하사탕’을 볼 때 짓누르던 중압감이나 울대를 자극하던 그 먹먹함은 감동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이창동의 세번째 영화 ‘오아시스’ 역시 예의 ‘고통스런 진정성’에서 빠지지 않는다. 사회에서 냉대받고 기피당하는 전과자(설경구)와 뇌성마비 장애인(문소리)의 사랑을 지켜보는 것은 편안하지 않다. 연신 훌쩍거리며 맹하고 눈치 없는, 가족들마저 없을 때가 더 편했다고 여기는 전과자 종두의 비루한 일상과 뒤틀린 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힘겹게 이어가는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의 삶은 그들에 대한 묘사가 징그러우리 만큼 사실적이어서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그들을 결과적으로 핍박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이며 나름대로 그들을 위하는 가족이라는 데에서, 우리도 그들처럼 느끼고 행동할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데에서 더욱 그렇다. 종두와 공주가 비로소 자신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몸을 섞을 때 공주의 가족들이 그 모습을 종두에 의한 강간이라고 의심없이 단정할 때, 경찰서에서 끌려나가는 종두를 보며 안타까워 말을 쏟다 실신하는 공주를 강간에 의한 충격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단언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종두의 말은 들어보지 않은 채 의례 그런 놈이라고 치부하는 종두 가족의 모습 위에, 그리고 장애인에게 성욕이 일더냐고 묻는 경찰관에게서 장애인과 비장애인간의 소통부재와 분리의식이 벽처럼 솟아있음을 본다. 그것은 현실이다.

 관객 역시 공주의 모습에 가까이 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공주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벽에 걸린 카펫의 오아시스 그림에 드리워진 나뭇가지 그림자를 없애려 경찰서를 탈출,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를 쳐내는 종두에게서는 공주를 향한 마음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이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종두를 매개로 하여 공주에게 마음을 열도록 이끌어감과 아울러 삭막한 현실에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한다. 바로 이창동의 영화가 움켜진 진정성의 힘이다. 고통스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오아시스’는 제목 그대로 목마른 자들이 목을 축이고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이다. 메마른 세상에서 잠시나마 갈증을 덜 수 있는 곳-그곳은 종두와 공주가 마음껏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현실에서든 팬터지의 세계에서든.

<영화평론가, 수원대 교수 chohyej@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