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경쟁력이다>(9)여성경쟁력 키우자

 97년 7월 말. 세계적 정보기술(IT)업체인 미국 휴렛패커드(HP)의 이사진은 100명이 넘는 후보 중에서 만장일치로 당시 마흔네살의 한 여성을 새로운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했다. ‘세계최고의 여성 CEO’ ‘실리콘밸리의 신데렐라’ 등 갖가지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칼리 피오리나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당시 한 기자가 60여년의 HP 역사상 첫 외부 CEO이자 여성 CEO인 그녀에게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새로운 변화와 전략이 필요한 HP의 요구 조건과 내 능력이 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저 우연일 뿐이다”며 당당히 밝혔다. 인터넷과 디지털이 각광받는 21세기 경제환경은 지식·정보 사회의 진전으로 새로운 산업, 특히 아름답고 창조적이며 소프트한 산업이 주목을 받으며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이에 따라 남성보다 감성적이고 미적인 능력이 뛰어난 여성들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국가의 중요한 ‘한 자원’으로 부각되고 있다.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 도널드 존스턴조차 “지식기반 사회의 국가경쟁력은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인력에 달려 있다”며 여성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한 축인 여성은 남아선호 사상이 유별난 이 곳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여전히 마이너리티이자 남성의 조연 대접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 피오리나와 휘트먼(e베이 CEO) 같은 세계적 여성 경영자가 가능할까. 유감스럽게도 대답은 아직은 노(No)다. 한국의 IT여성들은 능력과 자질면에서 피오리나와 휘트먼 못지 않은, 아니 더 나은 재능을 갖고 있지만 미국과 천양지차인 남성 위주의 사회 인프라 때문에 ‘큰 인물’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한 30대 여성 CEO는 “과거 대기업에서 일할 때는 좋은 업무성과를 내더라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는데 창업 후에는 내 소신대로 일할 수 있어 좋다”며 남성 위주의 대기업 문화를 꼬집고 있다. 

 여성 벤처 1세대인 이화순 현민시스템 사장은 “사업을 처음 시작했던 1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남성 위주의 문화가 굳건한 건 여전하다”며 이 땅의 마초(macho) 문화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디지털 사회로 접어들면서 여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성공하기 좋은 시기를 맞고 있으며 다행히 앞으로의 10년은 이전 10년과 달리 여성 기업가의 환경이 나아질 것”이라며 거대한 남성 위주의 벽이 조금씩 낮아지고 있음을 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여성들이 대기업에서 임원이 되려면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죠. 또 행여 된다 하더라도 보통 20년 이상이 걸립니다. 하지만 인터넷산업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여자든 남자든 해 볼 수 있는 길이 있죠”라는 한 여성 CEO 창업의 변처럼 21세기 지식사회는 남성보다도 여성과 궁합이 더 잘맞는 ‘기회의 땅’이 될 듯하다. 하지만 아직 IT분야의 국내 여성 CEO는 질적인 문제를 차치하고 숫적으로 절대 열세다.

 한국IT중소벤처기업연합회(PICAA) 조사에 따르면 2000년말 현재 중소기업청에서 인가받은 1만개 벤처 중 생명공학 분야를 제외하고 컴퓨터·정보통신·소프트웨어·인터넷 등 소위 순수 IT 벤처 기업은 3200여곳. 이중 PICAA가 2795개 IT 벤처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성 CEO 기업은 겨우 3.5%에 불과한 94명이었다. 나머지 2701개 96.5%가 남성이 CEO였다. 대기업과 공기업으로 가면 더 비참하다. LG전자·삼성전자·SK텔레콤 등 내로라하는 IT 대기업에서 여성 임원은 아예 없거나 한, 두명에 불과하다. 최근 KT 인사에서 이영희 해외 ADSL 사업팀장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임원에 승진한 것에 대해 각 언론이 대서 특필한 사실은 우리의 여성 위상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학연·지연이 난마처럼 얽혀 빽으로 작용하는 풍토도 여성CEO들에게 ‘크나큰 악재’다. 맨손으로 건너가 실리콘밸리에서 한국인 벤처신화를 일군 김태연 YTK 그룹 회장은 이에 대해 “한국사회는 여성들에게는 몇배나 힘든 구조다. 게다가 실력으로 되는 사회가 아니라 소위 줄이 있어야 성공하는 사회다”고 개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집안일에 손하나 까딱 않는 것이 일상사인 ‘대한민국의 현실’도 여성 기업인에게 좌절감을 준다. 여성 기업인들은 회사일은 물론 육아나 가사 등 집안 일도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소위 슈퍼우먼 신드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이영아 컨텐츠코리아 사장도 “그동안 육아와 가정 문제로 수차례의 갈등과 고비가 있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상덕 여성부 차별개선국장은 “여성인력을 국가와 기업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조차도 아직은 인식이 부족하다”고 밝히며 “국가가 여성인력을 활용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성 CEO와 기업인들은 한결같이 여성이라서 주목받기보다는 능력과 비전, 그리고 사업모델로 평가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남성, 여성의 구별이 아니라 누가 보다 효율적으로 일하고 많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자는 말이다.

 경영컨선턴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구본형씨는 자신의 저서 ‘오늘 하루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에서 소극적이고 수줍고 얌전한 여성적 이미지는 여성의 내면적 특성이 아니라고 일갈하며 “여성은 정신적으로 유연하다. 남성들이 추상적으로 개념이나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논리구조 속에 있다면 여자는 훨씬 더 유연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못한 것을 버리고 더 나아가는 것을 즉시 선택할 수 있는 정신적 적응이야말로 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아 성공할 수 있는 자산이다”며 여성의 장점을 언급하고 있다.

 부드럽고 강한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지식사회를 맞아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라도 여성을 또 다른 성과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 이들을 키우고 육성할 국가적 지원과 함께 남성 위주의 사회인프라에 메스를 들이대야 할 때가 오고 있다.

 <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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