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나노기술 현장을 찾아서>(8)일본 센다이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2시간만에 일본 동북부의 전원도시 센다이에 도착했다. 공항문이 열리자 시원하고 깨끗한 바람이 정신을 맑게 한다.

 센다이는 ‘그린시티(green city)’라는 별명답게 매우 쾌적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도시로 일본의 나노기술을 취재하기 위해 취재진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이다.

 이 한적한 지방도시가 도쿄보다 더 중요한 일본 나노기술의 핵심지역이라니. 일본에선 과학기술연구가 수도권에 집중되지 않고 지역간에 고르게 추진되는 점이 매우 부럽다. 센다이의 나노기술연구는 도호쿠(동북)대학과 그 산하의 연구소들이 주도하고 있는데 특히 나노기술을 이용한 재료연구쪽에선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정평이 높다. 

 뭐든지 작게 만드는데 재능을 지닌 일본사람들이 도대체 나노기술연구에선 얼마나 앞서가고 있을까. 한국은 어떻게 해야 저들을 따라잡을지. 낯선 도시 센다이에서 맞는 첫날밤은 가벼운 흥분으로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전자기재료 연구소

 센다이 시내에 위치한 ‘전자기재료연구소’는 나노기술을 응용한 자성재료개발에서 세계선두를 달리는 곳이다. 이곳은 지난 50년대부터 모기업이나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는 개인연구소로 운영되고 있다. 개인연구소지만 건물규모와 연구장비는 어느 연구소 못지 않다.

 6층짜리 연구동 전체에 박막재료, 박막소자제작 및 정밀계측장비 등 각종 나노관련 연구시설이 들어차 있다. 하지만 기술연구원은 고작 7명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연구원 일인당 설비투자면에서 세계 최고수준이다. 동행한 KIST 임상호 박사는 값비싼 나노기술 연구장비를 둘러보며 ‘과학자들의 디즈니랜드’라고 연신 감탄한다. 일개 개인연구소가 이 정도의 연구시설을 갖추다니 기술대국의 방대한 뿌리를 짐작케 했다.

 “휴대폰 전자파가 문제되는 고주파대역에서 우수한 차폐특성을 가진 나노재료를 개발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입니다.”

 오누마 박사는 파장이 짧은 초고주파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도록 5∼15㎚의 균일한 나노결정을 지닌 자성박막을 거의 완성했으며 향후 인체유해성 논란이 심한 전자파문제를 해결할 기술적 대안이라고 자랑한다.

 이 연구소가 최첨단의 나노자성박막을 만드는 방식은 의외로 평범하다. 우수한 비정질 금속재료를 골라내서 적당한 열처리를 가하는 것이다. 마치 일본도를 만들 때 우수한 철을 골라 무수히 망치로 두들기고 담금질을 반복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매우 아날로그적인 금속가공방식인 것이다. 여타 나노재료연구소들이 아예 분자구조를 재배열시켜 새로운 금속소재를 만들려는 것과 달리 ‘전자기재료연구소’는 전통적인 금속가공법을 이용해 나노구조의 새로운 금속재료를 개발하는 데 벌써 15년째 매달리고 있다.

 “나노시대에도 장인정신은 필요합니다. 금속분자를 마음대로 배열하는 첨단 나노기술과 전통적인 금속가공기술도 결국 좋은 쇠붙이를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누마 박사는 마치 대장간에서 일본도를 두드리는 장인처럼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획기적인 첨단기술이 나와도 전통적인 기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쉽게 버리지 않는, 한편으론 답답하게도 보이는 일본과학자들의 보수적인 기술관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도호쿠대 금속재료硏·전기통신硏

 두번째로 찾은 도후쿠대학은 1907년 일본의 세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된 일본 동북부의 교육중심이다. 도후쿠대학은 일본 최초로 외국인 학생을 받아들이는 등 개방적인 학풍을 지켜왔는데 권위적인 도쿄대에 비해 이공계분야에서 강점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긴켄’으로 불리는 도후쿠대학 금속재료연구소는 이번 센다이 취재여정의 핵심이다.

 긴켄의 내부 분위기는 매우 활기차다. 연구원 대부분이 30, 40대로 젊고 출퇴근시간, 휴일에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특히 긴켄의 자성재료 연구실에선 분자빔증착기법(MBE)으로 서로 다른 금속원자를 시루떡처럼 한층씩 쌓아올려 인공 다층박막을 제조하는 놀라운 기술을 시연했다. 코팅막이 원자 하나로 구성되는 세상에서 가장 얇은 나노코팅기술인 것이다.

 연구원 시마박사는 원자 하나의 단위로 쌓아올리는 나노코팅기술은 전세계적으로 유일하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나노기술로 다층금속박막을 만들면 자연상태에선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구조의 금속재료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요. 미국, 유럽서도 아직 원자를 한층씩 교대로 쌓아올리는 박막기술은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얇은 원자층을 하나씩 쌓아올려 어느 세월에 쓸만한 두께의 금속박막을 제조하느냐는 질문에 이미 상용화 단계에 들어선 기술이라고 답한다. 대표적인 상용사례는 철(Fe)과 백금(Pt)을 한층씩 적층해 제조한 인공박막으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저장용량을 높이는 차세대 자기소재로 매우 우수한 특성을 나타내 세계 HDD업계가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흔히 사용하는 PC안에도 나노기술은 조용히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긴켄의 건너편 연구동에 위치한 도후쿠대학교 전기통신연구소에서 만난 히데오 오노 교수는 일본 나노 자성반도체의 개척자로 유명하다. 오노 교수의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전형적인 일본인이지만 매우 유창한 영어에 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진 일본 나노기술의 핵심인물이다.

◆日나노기술전망

 도후쿠대 전자공학과 미가쿠 다카하시 교수는 일본 나노기술의 배경과 발전방향에 대해 취재진에 명쾌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나노기술연구에 국가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나노기술이 향후 일본경제가 살아갈 핵심기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본은 결코 부유한 나라가 아니에요. 경제는 10년째 제자리고 국민들은 낮은 생활수준에 지친 상태입니다. 게다가 중국경제가 무섭게 따라오지 않습니까. 이젠 전통적인 제조기술로는 향후 일본국민을 먹여살리기 힘들다는 점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나노기술에 희망을 거는 겁니다.”

 그는 나노기술이 실제 일본의 제조업에 적용되는 사례가 있다고 소개했다. 일본의 나노기술연구의 구체적 응용분야는 일차적으로 휴대폰이다. 현재 아이모드로 대표되는 일본의 무선인터넷은 세계적인 수준인데 미국과는 다른 지극히 일본적인 인터넷문화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이러한 아이모드 휴대폰에 HDTV와 PC, 비디오카메라, 게임기까지 모두 집어넣는 획기적인 상품을 만드는 것이 일본 나노기술의 핵심목표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손톱만한 메모리에 2시간짜리 고화질 영화를 수록하고 컴퓨팅소자도 분자단위로 줄여야 하는데 나노기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노기술과 무선인터넷은 향후 일본이 살아갈 2대 핵심기술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노기술이 일본, 미국같은 돈많은 선진국에만 적합한 과학기술은 아닙니다. 한국처럼 변화에 적응력이 빠른 나라는 충분히 이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어요. 과거 삼성전자가 D램에서 성공한 사례처럼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하면 한국도 곧 현실화될 나노기반 신경제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지닐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분명 머지않은 장래에 아이모드 휴대폰 안에 온갖 디지털세상을 축소시켜 넣는데 성공할 것이다. 동맥경화에 걸린 일본경제를 되살리는 희망으로 떠오른 나노기술이 향후 일본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궁금하다.  

<센다이=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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